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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의료원소식 ::

강남, 세브란스 역사화·펜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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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세브란스병원은 지난 5일 제중원의 설립 및 세브란스의 발전에 관한 역사화 게시판을 설치했다. 이번 역사화 게시판에는 김건배, 김영택 화백이 그린 역사화 및 펜화 9점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다.



2018/03/27 15:39 2018/03/27 15:39

130여 년 세브란스의 역사를 만나다
3-김건배 화백 유화작품 13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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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단발하는 에비슨 박사 (1895)
1895년 내려진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팅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이승만은 에비슨과 함께 조선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얼마 후 이승만은 에비슨의 집에 찾아와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이승만의 요청을 받은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를 자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이승만은 잘린 상투를 거즈에 싸서 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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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을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1919)
1919년 3월 1일, 일제 지배의 부당성에 항거하는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세브란스의 교수, 학생, 직원들도 모두 적극 참여해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세브란스병원의 약국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은 최연소자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3·1 운동과 관련해 세브란스 학생들은 세브란스병원 외래 진료소 4층에 있는 암실에서 독립선언문을 찍었다. 일본 경찰이 병원을 수색하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관련 증거들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겼다. 이때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지방에도 전해져 만세운동에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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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귀환 동포를 구호하는 세브란스 학도대(1945)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국내외에서 징용, 징병 됐던 수많은 동포가 귀환했다.
학교가 서울역 앞에 위치해 귀환하는 동포들을 자주 보게 된 세브란스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동포들이 굶주리고 헐벗은 상태에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이에 학생들은 서울역에 세브란스 역전 구호소를 설치하고 귀환동포를 위한 음식제공, 진료, 서울역 주변의 청소와 질서 확립 등의 활동을 벌였다. 급한 질병을 치료하고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귀환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울역 당국과 협의해 무료승차권도 발급해줬다. 또 건국준비위원회와 서울시청을 방문해 전재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머무를 동안 제공할 식량과 옷가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세브란스 학생들의 이러한 활동은 세브란스의 봉사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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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의거에 나선 연세의대생들 (1960)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됐다.
특히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의 무력진압은 더 큰 반발을 불러왔고, 의과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서 독재정권 퇴진을 외쳤다. 시위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의예과 2학년 최정규 학생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됐다. 최정규 학생에게는 이후 명예 의학사 졸업장이 주어졌다. 또한, 시위 현장에서 부상당한 많은 학생이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으로 몰려들어 이내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
그래서 학생은 물론이고 기초의학 교수들까지 모두 나와 밤을 새워가며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2017/08/07 13:49 2017/08/07 13:49

130여 년 세브란스의 역사를 만나다
2-김건배 화백 유화작품 13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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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과 박성춘ㆍ서양 父子 만남(1900. 8)
에비슨이 치료한 환자 중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있었다. 박성춘의 부탁으로 에비슨은 아들 박서양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결국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가 되었다. 그는 모교에 남아 교육과 진료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문제를 삼은 학생들에게“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이주해‘ 구세병원’을 개업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 동포를 진료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軍醫)로 활동하였다. 박서양은 조선 사회의 가장 낮은 신분 출신이었지만 새로운 학문을 배워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세브란스가 배출한 큰 의사(大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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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의학교과서 편찬(1905~1910)
1894년 9월 제중원을 넘겨받은 에비슨은 1895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국장으로서 활동했다. 콜레라 유행이 끝난 후 에비슨은 학생을 모아 제중원에서 의학 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의학 교육을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한글로 된 의학교재였다. 이를 위해 에비슨은 먼저 그레이의 해부학 교과서를 조금씩 번역해 교재로 활용했다.1904년 제시 W. 허스트가 합류하자 에비슨은 교육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 1905년 약물학 교과서를 펴낸 이후 해부학, 생리학을 비롯하여 산과, 외과 등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의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한글 교과서 사용을 금지하여 에비슨의 노력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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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의 구한국 군인 치료 (1907)
1907년 8월 통감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구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부상당한 한국 군인 50여명은 일본 병원에서의 치료를 거부하고 세브란스로 가기를 요청하였다. 에비슨은 적십자대를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에 전념했다. 갑자기 몰려든 부상병들을 돌볼 인력이 부족해 의학생은 물론이고 병원 가족들까지 참여하였다. 이전까지는 남녀유별 관습에 따라 간호학생이 남자 환자를 돌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자 이러한 인습은 순식간에 허물어져 간호학생들은 밤 새워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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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한 세브란스 씨 (1907)
1904년 9월 23일 세브란스 씨의 기부로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브란스 씨는 개원 후 3년이 지난 1907년 9월 주치의사인 러들로 박사와 함께 새 병원을 찾았다. 이 방문은 아시아 지역의 장로회 선교부를 돌아보는 여행의 일환이었다. 서울을 방문해 자신의 기부로 건축된 병원을 직접 본 세브란스 씨는 크게 만족해했다. 그러나 병원에 의학생의 교육을 위한 공간이 없는 것을 보고 3만 달러를 추가 기부하였고,  1913년 학교 교사 겸 외래진료소가 세워졌다. 1913년 세브란스 씨가 타계한 이후에는 아들 존과 딸 엘리자베스가 대를 이어 세브란스를 후원하였고 그 지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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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모교에 남겠다는 7박사 (1908)
엄격한 교육과 지도를 받고 첫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에비슨은 졸업 후의 계획을 물었다. 이에 학생들은 모교에 남아 후학들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했고, 에비슨은 “나는 일곱 사람의 의사를 양성한 줄로 생각하였더니 의사뿐 아니라 참다운 인격자를 양성하였구나!”하고 감탄했다. 이들에게는 의술개업인장 제1~제7번까지 부여,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7명의 의사에 그치지 않고, 모교에 남아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서양의학이 한국인에 의해 토착화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2017/07/12 09:09 2017/07/12 09:09

130여 년 세브란스의 역사를 만나다
1- 김건배 화백 유화작품 13점 소개



의료원은 연세대 창립 132주년, 합동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브란스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모습을 역사기록화로 구현해 종합관 4층 로비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역사기록화 작품은 총 13점으로, 김건배 화백은 철저한 고증 속에 국내 근대의학을 개척한 세브란스 130여 년 역사를 유화 작품으로 그려냈습니다. 또한, 의대 여인석 교수(의사학과), 박형우 동은의학박물관장, 인요한 국제진료소장이 고증과 주석 작성 등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연세의료원소식에서는 모교를 방문하기 어려운 국내 및 외국의 의, 치, 간호대 동창을 위해 총 3회에 걸쳐 작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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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N. 알렌 박사의 민영익 刺傷 치료 (1884. 12. 4)
우정국 개원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심한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민영익은 치료를 위해 외교고문이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를 치료하러 온 여러 명의 어의(한의사)들은 칼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급히 불러 치료하게 했다. 민영익은 알렌의 지혈과 봉합 치료 등 서양 외과술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 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이듬해인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이 개원한다. 제중원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의학은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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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G. 언더우드의 토론토 강연과 올리버 R. 에비슨 (1892. 9)
토론토 대학교 의학부와 온타리오 약학교의 교수이자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일본으로 파송된 선교사의 소식을 통해 선교사로서 막연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에비슨은 마침 1892년 9월 토론토를 방문한 언더우드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조선의 실상과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언더우드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에비슨은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했다. 에비슨은 자신이 소속된 캐나다 감리교회에 파송을 요청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지원하였고, 마침 언더우드도 그를 조선에 파송할 적임자로 추천했다. 이에 따라 에비슨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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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의 한국 도착 (1893. 6. 16)
에비슨이 한국으로 출발할 즈음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고, 마침 셋째 아들이 심한 폐렴과 중이염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에비슨은“ 아이가 죽는다 해도 병 치료를 위해 출발을 늦출 수 없다. 아이가 밴쿠버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으면 조선으로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출발을 강행한다. 에비슨은 토론토에서 캐나다를 가로질러 밴쿠버에 도착한 후, 태평양을 건너는 여객선으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3년 6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에 넷째 더글라스가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토론토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세브란스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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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홀의 에비슨과 루이스 H. 세브란스 (1900. 4. 30)
1899년 3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에비슨은 이듬해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였다. 에비슨은“ 조선의 낙후된 의료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 선교의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더 큰 규모의 병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연설을 듣고 감동을 한 세브란스 씨는 병원 건축기금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에비슨이 감사를 표하자 세브란스 씨는“ 받는 당신보다 주는 저의 기쁨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세브란스 씨의 기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되었다.

2017/06/28 13:24 2017/06/28 13:24

역사기록화 전시회
창립 132주년·통합 60주년 기념 주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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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창립 132주년·통합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역사기록화 전시회가 지난 5일 종합관 4층에서 개막했다. 전시회에는 세브란스 역사의 주요 사건과 정황을 다룬 김건배 화백의 유화작품으로 구성됐다.

한국 최초 선교사 알렌 박사의 민영익 치료, 카네기홀에서 처음 만난 에비슨 박사와 세브란스 씨, 통감부에 의한 구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 중 부상당한 한국 군인을 치료하는 세브란스 의료진과 학생들, 3.1 독립선언문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 등 13점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는 의대 여인석 교수(의사학과), 박형우 동은의학박물관장, 인요한 국제진료소장이 고증과 주석 작성 등의 도움을 줬다.

개막식에는 윤도흠 의료원장,  김영석 행정대외부총장, 김건배 화백, 이승영 전 재단이사, 정남식 전 의료원장, 대학본부와 의료원 보직자, 교직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기념 테이프 커팅 후 김건배 화백의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관람했다.<사진>

한편, 의료원은 정남식 전 의료원장의 주도하에 역사기록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유화 전시회와 함께 본관 3층 아트스페이스에서 김영택 화백의 세브란스 옛 건물 펜화 작품 12점이 전시 중이며, 향후 종합관 4층 알렌기념관 쪽으로 이동 전시할 예정이다.


 



 
2017/04/13 14:20 2017/04/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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