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 치의학의 태동과 해방
연세 치의학 100주년 특별기획


제중원 130주년,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우리나라에 서양 근대치의학이 도입된 지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치의학의 시작은 미국의 선교치과의사 쉐플리가 1915년 11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로 치과학교실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의료원소식은 치의학 도입 100주년을 맞아 3회에 걸쳐 우리나라 치의학의 시작인 연세 치의학의 역사와 미래를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 연세 치의학의 태동과 해방
2. 해방 이후 치과대학 설립
3. 치과대학의 발전과 미래



1. 제중원에서 시작한 치과치료와 교육
갑신정변에서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Horace N. Allen)의 요청으로 1885년 4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설립되고 제중원 의학당(1886년)도 개교하였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 구강질환 처치에 관한 질병별 통계가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제중원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로 이관되면서 제중원 의학당에서는 최초의 치과의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1901년 제중원의 '의료활동보고서'에는 의학생들이 에비슨(O. R. Avison)의 자문을 구해 직접 발치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것은 발치기술이 선교의사에 의해 의학생들에게 교육된 최초의 기록이다. 따라서 제중원을 근대치의학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전문적인 진료와 정규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교실을 개설하면서부터다.

2. 쉐플리의 세브란스 선교치과의사 부임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는 기독교 신앙 속에 성장하였다.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1906~1910) 시절 '학생자원운동'과 '면려청년회'에 참석했다. 미국의 학생자원운동은 1888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2만 500명의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였다. 해외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해외선교에 대한 소망을 키우던 쉐플리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에 입학해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한 뒤 해리스버그에 개원했다. 개원한지 2주 만에 "장로회 선교본부가 중국에 파송할 치과의사를 찾는다"는 소식에 쉐플리는 장로회에 편지를 보냈다.
"현재 나는 약 1200달러 상당의 치과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장비구입으로 약 1200달러의 부채가 있습니다. 만일 선교치과 의사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헌신하겠습니다(1913년 12월 23일)."
그러나 장로교는 중국지부 치과의사 파송요청을 취소했고, 마침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이 치과의사를 찾고 있어 연결해 보았지만 쉐플리의 부채와 어린 나이 때문에 유감스럽다고 답했다. 하지만 쉐플리는 1914년 9월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정식 지원서와 6명의 추천서, 건강진단서를 보냈다.
1914년 12월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 부부는 쉐플리의 치과와 약혼녀 루스 래플리 가정을 방문한 뒤 쉐플리의 치과진료장비를 인수할 것이며, 월급은 존 세브란스와 알렌 부인이 지원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1915년 2월 쉐플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교수로, 래플리와 함께 한국선교회로 임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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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플리의 치과진료 모습


3.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쉐플리 부부는 1915년 8월 31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해 11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치과학교실이었고, 종합병원급에서는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치과진료실이었다. 동양에서 해외선교운동과 연결된 치과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초대 과장인 쉐플리는 구강진료와 교육,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목표로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료기술을 소개하고, 치과학을 강의하였다. 이와 비교해 조선총독부의원의 치과는 외과 산하로 부설되었다. 쉐플리는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도제식 훈련과는 차별화된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해 치과진료의 범위와 질을 높이고, 공중구강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쉐플리는 미국 치과대학 부속진료소를 모델로 치과진료실을 정비하였다. 방사선 촬영(1916)을 하고, 전기엔진이 달린 4대의 철제치과유닛체어를 갖추었다. 항생제가 없던 시기 방사선 촬영은 구강농양의 위험을 예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구였다. 기공은 기공사에게 맡겼다. 총독부 치과보다 기자재면에서 우수했다. 시술은 간단한 보존과 발치에서 보철, 교정, 악안면수술까지 전범위로 확대하였다.
쉐플리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식생활과 부정교합 발생, 영구치 맹출과 발육 통계에 관한 연구를 계획하였다. 올바른 양치법과 구강병에 관한 대중 교육책자도 발간하였다. 또, 선교본부에 방사선 촬영과 치료비를 보조할 집단구강보건관리 예산을 요청하였다.
총독부는 1913년 '조선치과의사규칙'과 '입치영업자 취체규칙'을 공포해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업자의 신분을 보장했지만, 조선 내 치의학교 설립이나 치과의사시험은 실시하지 않았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학 강의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의대생에 국한해서 하도록 지시했다. 총독부는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하지만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치과의사와 교수 몇 명을 더 보강하도록 요청하고, 관계당국과 협의해 치과학교나 수련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1920년 11월 안식년을 맞은 쉐플리는 대학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쉐플리가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위해 세브란스에 독립적인 치의학 교실을 개설한 것은 한국치의학 교육의 100년을 여는 뜻 깊은 일이었다.

4. 부츠의 세브란스의전 치과센터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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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

2대 치과과장으로 부임한 부츠(J. L. Boots, 1921. 3 - 1939)는 구강외과를 담당하면서, 대국민 구강보건교육과 의료윤리를 강조하였다. 부츠는 부임 직후 압축공기시설을 장착한 체어를 들여왔고, 최신 장비를 갖춘 치과건물을 짓기로 했다.
1925년 부츠는 치과건물 신축을 위한 기금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츠는 10달러짜리 '벽돌 만개 팔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운동을 펼쳤다. 가족들과 한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하고, 여러 지역 치과의사회를 방문하였다. 한국의 풍물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을 소개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29년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 1만 달러의 기부금을 약속하며 "때가 되면 한국인들에게 신축건물의 운영을 인계하라"고 지시하였다.
1931년 10월 건평 397㎡(120평)의 3층짜리 미국식 치과종합병원 건물이 완공되었다. 건물 신축을 계기로 세브란스 치과는 최신 설비와 27명의 직원을 갖춘 치과종합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모금부터 완공까지 치과학교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여 이후 치과 수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은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치의학 연구와 진료, 수련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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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가 미국치과의사회 모금으로 신축한 최신식 치과진료소

5.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같은 시기 맥안리스 선교사는 보존·보철분야를 담당하며, 치과의사와 기공사 교육에 힘썼다. 진료내용은 반간접법 인레이, 도재소부치아, 국부의치 원피스캐스팅, 교합기 사용, 근첨멸균밀봉 신경치료 후 포스트 장착 등 미국 치의학술 발달과 같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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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맥안리스 가족

일제강점기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에서는 경성치전 졸업생 23명에게 대학원 과정과 같은 임상수련과 스스로 연구해서 발표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켰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최소 5~6년 이상씩 근무하면서 최신 미국식 치과의술을 익혔다. 부츠와 맥안리스는 한국인 수련의들은 업무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신의가 깊다고 평가해 강의와 치과운영을 맡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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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경

이유경은 미국 피츠버그치과대학 3학년에 편입(1935~1937)했다. 'New Conception of Articulator와 보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한국 최초로 미국치과의사(D.D.S)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강사로 진급(1938. 10)하였다. 정보라는 유학 전부터 각종 신문에 '치아위생과 어머니의 지킬 일', '무지각제 발명', '의치발명', '치아와 열등감', '치아와 범죄' 등을 연재하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맥안리스가 나온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에 입학해 1년 만에 '조선인의 혈액형과 우치발생빈도에 관한 연구'로 미국치과의사(D.D.S)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유학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세계 치의학술의 발전상을 흡수해 치과계의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부츠의 사임 후 3대 치과과장이 된 맥안리스는 치과학교실을 2년 간 운영하였다. 1938년부터 일제가 미국선교사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탄압하면서 1941년 맥안리스도 강제추방 당했다. 이유경이 4대 치과과장에 임명되면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세브란스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에는 교수에 박용덕, 조교수 박유신, 강사 김정규, 조수 이동섭, 부수 노성윤, 박응시가 각각 활동하였다. 미군정 시기 이유경과 정보라는 보건후생국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치전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합병되도록 했다. 안종서는 해방 직후부터 6차례에 걸쳐 대한치과의사협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경성치과대학 교수진 명단 중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에서 수련 받은 사람들은 병원장 이유경, 보철부 정보라, 김정규, 보존부 박유신, 김만수 등이 있다. 이와같이 일제강점기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을 유능한 지도자로 양성함으로 이후 우리나라 치과계의 선구자들로 만들었다.



2015/10/27 10:08 2015/10/27 10:08
아동 보건학의 선구자
소아과학교실의 큰 스승이신 윤덕진 교수님을 기리며…

조사 | 유철주 소아과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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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普園) 윤덕진(尹德鎭) 교수님은 1919년 생입니다. 금년에 만 96세를 맞이하였으며, 장수하셨습니다. 건강하셨기에 더 오래 곁에 계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올 6월 7일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소아마비로 중학교를 어쩔 수 없이 중퇴하셨지만 장애를 딛고 전문학교 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당당히 입학하신 의지가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졸업 후 전라북도 개정중앙병원 소아과장으로 근무하시면서 아동 보건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고, 미국 위스콘신 대학병원 전공의 과정과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으신 후 1957년부터 연세의대에서 근무하셨습니다.
한 국가사회의 문화척도가 되는 생명통계가 우리나라에 없음을 직시하여 처음 근무지였던 전라북도 개정면을 대상으로 영유아 사망 조사 연구를 하여, 그 결과를 미국 소아과학회지(Journal of Pediatrics)에 발표한 것이 우리나라 영유아 보건상태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학술 연구논문입니다. 또한 홍역이 걸렸을 때 가재의 생즙을 먹이는 잘못된 민간 요법이 폐흡충증을 일으킨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경기도 일대를 구석구석 다니며 가재를 잡아 연구한 결과와 우리나라 이유기 영유아의 식이 내용 및 성장발육 상태에 대한 논문을 같은 학회지에 발표하는 등 아동 보건 및 사회 계몽에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1966년부터 소아과학교실 주임교수를 맡으면서 세부전문 분야별로 전문 진료과목을 개설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세부전문 과목에 따라 진료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신 선각자였습니다.
정년 퇴임 후인 1988년에 후배 교수들의 연구 의욕을 고취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보원학술상'을 마련하여 올해로 28번째 연세의대 교수 중에서 우수 논문을 발표한 사람에게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대한소아과학회 이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회 발전에 공헌하셨을 뿐 아니라, 1982년 아시아 소아과학회를 유치하고 학술준비위원장으로서 학술대회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이러한 국내외 활동이 인정되어 1981년 5.16 민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윤덕진 교수님께서는 정년 퇴임하실 때 퇴임 후 10년 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시고 서예와 연구, 집필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이 지나시고 교수님께서는 '내가 정년퇴임을 할 때 10년의 계획을 고민하였던 것이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 때 더 장기간의 계획을 하였었다면 훨씬 더 의미있는 세월을 보냈을텐데…' 하시면서 항상 긴 안목으로 큰 꿈과 야망을 품으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아가는 길의 문을 열어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다른 길로 먼저 가시는 교수님을 기리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으면 만남이 있듯이 교수님의 모습을 후에 다시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교수님의 온화한 미소를 영정 사진으로 다시 대하며, 다음과 같이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존경하옵는 은사님, 은사님의 사랑과 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높으신 은혜를 늘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교수님의 가르침 가슴에 새기고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제자가 되겠습니다. 교수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015/06/25 11:18 2015/06/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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