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치과대학 설립




글 싣는 순서
1. 연세 치의학의 태동과 해방
2. 해방 이후 치과대학 설립
3. 치과대학의 발전과 미래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치과의료계에도 혼란과 격변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당시 등록된 남한의 치과의사는 257명으로 경성치과전문학교 출신 치과의사와 검정 출신 치과의사, 한지치과의사쪹), 입치사 등이 혼재하던 시기였다. 미군정은 한국의 구강보건행정 및 치과의료 체계와 치의학교육 제도를 미국으로 변화시켜갔다. 이 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훈련을 받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안종서와 정보라, 이유경 등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출신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일본인 교수진이 떠난 경성치과전문학교는 이유경, 정보라, 박유신, 김정규, 이영옥 등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출신들로 새롭게 교수진을 구성하였다.
미군정기 구강보건 행정 기구로 보건후생부 치무국이 생겼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치무계로 축소되었고, 경성치과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이듬해 의예과를 신설하고, 1947년 7월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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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치과의 수련의 교육은 '예방치의학과 보철, 보존, 교정, 구강외과를 세계 수준에 맞게 섭렵한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신 치료장비와 단계적으로 임상기술을 습득하는 체계적인 수련과정이 확립되어 있는 관계로 서울대 치대 졸업생들은 세브란스 치과에서 수련받기를 모두 선망했다. 이들은 교실원으로 입국하면 지금의 인턴과정인 교수와 선배 교실원의 진료를 한 달 씩 돌아가며 임상실습교육을 받았다.
또한 세브란스병원 치과 출신들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치과의료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5명의 교실원 출신이 1945년부터 1986년까지 8대에 걸쳐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대한치과위생사협회(김숙향), 대한치과기공사협회(유성준)의 초대 회장을 배출하게 된다. 미군정기에 보건후생부의 보건후생국에 치무과가 설치되자 세브란스연합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 근무하면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유경과 정보라가 한국인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한국전쟁과 세브란스병원 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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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헌택

한국전쟁은 세브란스의대 치과학교실과 세브란스병원 치과의 가장 큰 시련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동섭과 지헌택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주요 치과 장비들을 옮겨 거제도 장승포로 이동, 세브란스 구호병원의 부속 치과로서 운영하며 진료했다. 거제도 세브란스 치과는 피난민은 미8군의 지원을 받아 모두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병원 운영은 해외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꾸려갔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치과의료시스템은 큰 공백을 맞았다. 서울 치과개업의 214명 중 100여명이 실종 또는 사망하여 80%가 돌아오지 못했다. 휴전 직후인 8월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서울 병원으로 복귀했으나 건물만 남아 있을 뿐 모든 기자재와 시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거제도로 옮겨간 치료 장비를 활용해 치과진료를 간신히 이어갈 수 있었다. 한 달 후 박용덕이 합류하면서 점차 진료정상화를 이루어갈 수 있었다.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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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키너스

휴전과 함께 보류되었던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합동 이사회를 통해 마침내 1957년 1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 역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치과학교실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당시 강사 이동섭과 외래강사 박용덕, 치과의료 선교사 메키너스(John McInnes)가 교수진으로 있었다. 메키너스는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에서 구강외과를 전공하고, 한국의 치과 복구를 위하여 1956년 파송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였다.
치과교정학을 전공하여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김귀선은 메키너스의 권유로 세브란스병원 치과에 부임해 국내 최초로 전문적인 치과교정 진료를 시작하였다. 김귀선은 1960년 사임하여 개원하였다가 1971년부터 4년 동안 치과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김낙희는 치주학을 전공하여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9년 세브란스병원 치과에 부임하여 국내 최초로 전문적인 치주과 진료를 시작하였다.
통합으로 치과학교실 책임을 맡은 이동섭과 메키너스는 치과대학 설립을 준비했다. 치과대학 설립 구상을 담고 있는 첫 번째 공식 문서인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창설에 관한 보고서'는 1957년 2월 보고되었다. 메키너스는 이 보고서에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이후 치과대학의 구체적인 설립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을 위한 건의서(1963)'이다. 이 문건은 설립목적부터 기구 계획표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설립 5개년 계획이 들어있다. 이동섭은 전문과목별 교수 충원과 수련의 제도의 확립, 설립 계획 수립 등 본격적인 치과대학 설립 계획을 추진하였다.
연세대의 치과대학 설립계획이 알려지면서 치과계의 반대가 표면화되었다. 이미 전남대학교와 경북대학교가 치과의학부 학생을 모집하였다가, 치과계와 대한치과의사회(대한치과의사협회)의 반대로 치의학부가 폐지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이에 이동섭은 서울대 치과대학의 김동순 학장을 만나 한국 치의학 발전을 위하여 연세대 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한편, 여러 치과계 지도자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한 끝에 대한치과의사회의 학교설립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동섭의 후임 지헌택 과장은 대학설립 신청과 인가 과정을 주관하였다. 재단 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후 1965년 10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허가 요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문교부는 1967년 12월 4일 마침내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을 최종 승인했고, 1968년 3월 제1회 치의예과 학생 40명이 입학했다.
치과의료선교사 쉐플리가 1915년 11월 1일 부임하여 치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한지 53년 만에 이룬 값진 결실이었다. 이후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은 한국 근대 치의학의 요람이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 이후 신설된 첫 단과대학으로 '연세' 통합정신을 구현하게 되었다.

✽) 지정된 일정 지역에서만 진료할 수 있는 치과의사면허(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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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1 14:13 2015/11/11 14:13
연세 치의학의 태동과 해방
연세 치의학 100주년 특별기획


제중원 130주년,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우리나라에 서양 근대치의학이 도입된 지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치의학의 시작은 미국의 선교치과의사 쉐플리가 1915년 11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로 치과학교실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의료원소식은 치의학 도입 100주년을 맞아 3회에 걸쳐 우리나라 치의학의 시작인 연세 치의학의 역사와 미래를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 연세 치의학의 태동과 해방
2. 해방 이후 치과대학 설립
3. 치과대학의 발전과 미래



1. 제중원에서 시작한 치과치료와 교육
갑신정변에서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Horace N. Allen)의 요청으로 1885년 4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설립되고 제중원 의학당(1886년)도 개교하였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 구강질환 처치에 관한 질병별 통계가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제중원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로 이관되면서 제중원 의학당에서는 최초의 치과의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1901년 제중원의 '의료활동보고서'에는 의학생들이 에비슨(O. R. Avison)의 자문을 구해 직접 발치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것은 발치기술이 선교의사에 의해 의학생들에게 교육된 최초의 기록이다. 따라서 제중원을 근대치의학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전문적인 진료와 정규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교실을 개설하면서부터다.

2. 쉐플리의 세브란스 선교치과의사 부임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는 기독교 신앙 속에 성장하였다.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1906~1910) 시절 '학생자원운동'과 '면려청년회'에 참석했다. 미국의 학생자원운동은 1888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2만 500명의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였다. 해외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해외선교에 대한 소망을 키우던 쉐플리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에 입학해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한 뒤 해리스버그에 개원했다. 개원한지 2주 만에 "장로회 선교본부가 중국에 파송할 치과의사를 찾는다"는 소식에 쉐플리는 장로회에 편지를 보냈다.
"현재 나는 약 1200달러 상당의 치과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장비구입으로 약 1200달러의 부채가 있습니다. 만일 선교치과 의사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헌신하겠습니다(1913년 12월 23일)."
그러나 장로교는 중국지부 치과의사 파송요청을 취소했고, 마침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이 치과의사를 찾고 있어 연결해 보았지만 쉐플리의 부채와 어린 나이 때문에 유감스럽다고 답했다. 하지만 쉐플리는 1914년 9월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정식 지원서와 6명의 추천서, 건강진단서를 보냈다.
1914년 12월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 부부는 쉐플리의 치과와 약혼녀 루스 래플리 가정을 방문한 뒤 쉐플리의 치과진료장비를 인수할 것이며, 월급은 존 세브란스와 알렌 부인이 지원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1915년 2월 쉐플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교수로, 래플리와 함께 한국선교회로 임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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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플리의 치과진료 모습


3.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쉐플리 부부는 1915년 8월 31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해 11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치과학교실이었고, 종합병원급에서는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치과진료실이었다. 동양에서 해외선교운동과 연결된 치과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초대 과장인 쉐플리는 구강진료와 교육,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목표로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료기술을 소개하고, 치과학을 강의하였다. 이와 비교해 조선총독부의원의 치과는 외과 산하로 부설되었다. 쉐플리는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도제식 훈련과는 차별화된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해 치과진료의 범위와 질을 높이고, 공중구강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쉐플리는 미국 치과대학 부속진료소를 모델로 치과진료실을 정비하였다. 방사선 촬영(1916)을 하고, 전기엔진이 달린 4대의 철제치과유닛체어를 갖추었다. 항생제가 없던 시기 방사선 촬영은 구강농양의 위험을 예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구였다. 기공은 기공사에게 맡겼다. 총독부 치과보다 기자재면에서 우수했다. 시술은 간단한 보존과 발치에서 보철, 교정, 악안면수술까지 전범위로 확대하였다.
쉐플리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식생활과 부정교합 발생, 영구치 맹출과 발육 통계에 관한 연구를 계획하였다. 올바른 양치법과 구강병에 관한 대중 교육책자도 발간하였다. 또, 선교본부에 방사선 촬영과 치료비를 보조할 집단구강보건관리 예산을 요청하였다.
총독부는 1913년 '조선치과의사규칙'과 '입치영업자 취체규칙'을 공포해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업자의 신분을 보장했지만, 조선 내 치의학교 설립이나 치과의사시험은 실시하지 않았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학 강의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의대생에 국한해서 하도록 지시했다. 총독부는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하지만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치과의사와 교수 몇 명을 더 보강하도록 요청하고, 관계당국과 협의해 치과학교나 수련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1920년 11월 안식년을 맞은 쉐플리는 대학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쉐플리가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위해 세브란스에 독립적인 치의학 교실을 개설한 것은 한국치의학 교육의 100년을 여는 뜻 깊은 일이었다.

4. 부츠의 세브란스의전 치과센터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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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

2대 치과과장으로 부임한 부츠(J. L. Boots, 1921. 3 - 1939)는 구강외과를 담당하면서, 대국민 구강보건교육과 의료윤리를 강조하였다. 부츠는 부임 직후 압축공기시설을 장착한 체어를 들여왔고, 최신 장비를 갖춘 치과건물을 짓기로 했다.
1925년 부츠는 치과건물 신축을 위한 기금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츠는 10달러짜리 '벽돌 만개 팔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운동을 펼쳤다. 가족들과 한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하고, 여러 지역 치과의사회를 방문하였다. 한국의 풍물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을 소개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29년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 1만 달러의 기부금을 약속하며 "때가 되면 한국인들에게 신축건물의 운영을 인계하라"고 지시하였다.
1931년 10월 건평 397㎡(120평)의 3층짜리 미국식 치과종합병원 건물이 완공되었다. 건물 신축을 계기로 세브란스 치과는 최신 설비와 27명의 직원을 갖춘 치과종합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모금부터 완공까지 치과학교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여 이후 치과 수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은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치의학 연구와 진료, 수련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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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가 미국치과의사회 모금으로 신축한 최신식 치과진료소

5.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같은 시기 맥안리스 선교사는 보존·보철분야를 담당하며, 치과의사와 기공사 교육에 힘썼다. 진료내용은 반간접법 인레이, 도재소부치아, 국부의치 원피스캐스팅, 교합기 사용, 근첨멸균밀봉 신경치료 후 포스트 장착 등 미국 치의학술 발달과 같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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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맥안리스 가족

일제강점기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에서는 경성치전 졸업생 23명에게 대학원 과정과 같은 임상수련과 스스로 연구해서 발표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켰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최소 5~6년 이상씩 근무하면서 최신 미국식 치과의술을 익혔다. 부츠와 맥안리스는 한국인 수련의들은 업무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신의가 깊다고 평가해 강의와 치과운영을 맡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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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경

이유경은 미국 피츠버그치과대학 3학년에 편입(1935~1937)했다. 'New Conception of Articulator와 보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한국 최초로 미국치과의사(D.D.S)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강사로 진급(1938. 10)하였다. 정보라는 유학 전부터 각종 신문에 '치아위생과 어머니의 지킬 일', '무지각제 발명', '의치발명', '치아와 열등감', '치아와 범죄' 등을 연재하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맥안리스가 나온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에 입학해 1년 만에 '조선인의 혈액형과 우치발생빈도에 관한 연구'로 미국치과의사(D.D.S)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유학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세계 치의학술의 발전상을 흡수해 치과계의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부츠의 사임 후 3대 치과과장이 된 맥안리스는 치과학교실을 2년 간 운영하였다. 1938년부터 일제가 미국선교사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탄압하면서 1941년 맥안리스도 강제추방 당했다. 이유경이 4대 치과과장에 임명되면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세브란스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에는 교수에 박용덕, 조교수 박유신, 강사 김정규, 조수 이동섭, 부수 노성윤, 박응시가 각각 활동하였다. 미군정 시기 이유경과 정보라는 보건후생국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치전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합병되도록 했다. 안종서는 해방 직후부터 6차례에 걸쳐 대한치과의사협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경성치과대학 교수진 명단 중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에서 수련 받은 사람들은 병원장 이유경, 보철부 정보라, 김정규, 보존부 박유신, 김만수 등이 있다. 이와같이 일제강점기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을 유능한 지도자로 양성함으로 이후 우리나라 치과계의 선구자들로 만들었다.



2015/10/27 10:08 2015/10/27 10:08
국내 최초 시행 IORT 1년만에 유방암 100례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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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세브란스병원 유방암센터가 지난 5일 유방암 IORT 시술 100례를 달성했다. 작년 8월 첫 시행 이후 1년여 만이다.
IORT는 암 수술 중 방사선 치료를 시행하는 치료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강남세브란스 유방암센터가 최초로 시행했다. 유방암 IORT의 경우 기존 방사선 치료 기간보다 1~2주 정도 치료 기간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정준 유방암센터장은 "IORT는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기존 방사선 치료를 대체한 치료법으로 각광받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치료법 보급을 위한 제도나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강남세브란스는 유방암 IORT에 이어 지난 8월 대장암 IORT도 국내 최초로 시행한 바 있다.



2015/10/15 10:51 2015/10/15 10:51
한국 최초 영문의학학술지 공개
1933년부터 세브란스 의전 발행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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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영문의학학술지인 'The Journal of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J. Severance Union Med. Coll.)' 논문이 일반에 공개된다.
의과대학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발행한 J. Severance Union Med. Coll.의 논문을 내달 1일 오픈하는 홈페이지(http://www. jseverancemed.org)를 통해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J. Severance Union Med. Coll.는 1933년 1권 1호, 1934년 2권 1호, 1935년 2권 2호와 3권 1호, 그리고 1937년 3권 2호 등 모두 5권이 발행됐다. 게재된 논문은 독일어 논문이 몇 편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 영문으로 작성돼 있다.
발행 당시 해부학의 최명학 교수를 편집위원장 겸 발행인으로, 편집위원으로 러들러와 파운드, 윤일선, 윤치왕, 김명선, 이영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최명학 교수가 1936년 퇴직하면서 3권 2호는 윤일선 교수가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학술지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이뤄진 학술적 연구성과를 집대성했다. 1915년 설립된 연구부(Research Department)의 지원으로 작성된 20여년간의 논문 100여편의 목록도 정리돼있다.
의과대학은 "세브란스에서 이뤄진 의학연구활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자료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1권 1호 첫머리에는 허스트 교수가 작성한 에비슨 박사의 일대기를 요약 정리한 내용도 담겨있다.

의과대학은 박형우(해부학), 여인석(의사학과) 교수의 자료제공과 고증을 거치고, 이춘실 숙명여자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와 (주)XMLink의 지원을 받아 J. Severance Union Med. Coll.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홈페이지는 J. Severance Union Med. Coll.에 게재된 논문 30편이 모두 파일화돼 게시되며, 참고문헌을 링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편,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가 J. Severance Union Med. Coll.의 학술적,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우리나라 의학논문의 Online Library인 KoreaMed와 Korea Synapse의 데이터베이스와 연동시킴에 따라 연구자들이 온라인상에서 J. Severance Union Med. Coll. 논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됐다.


2015/10/01 16:58 2015/10/01 16:58
아시아 최초, 다엽콜리메이터 Robotic IMRT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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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암병원이 아시아 최초로 다엽콜리메이터(Multileaf Collimator, MLC)를 장착한 세기변조방사선치료기(Robotic IMRT)를 도입해 3일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MLC는 원하는 모양으로 방사선이 조사되는 영역(Radiation Field, 조사야)을 형성해 종양주변의 정상조직을 보호하는 장치다. MLC를 이용해 기존보다 넓은 영역의 조사야(120×100mm)를 종양크기에 제한을 받지 않고 치료가 가능하다.
암병원은 지난해 11월 Robotic IMRT M6 치료기를 도입해 방사선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Robotic IMRT M6는 6개의 축을 가진 로봇으로 방사선치료의 방향에 제한이 없으며, 종양추적시스템을 이용해 치료 중 작은 움직임에도 높은 정확성을 보인다. 이번에 다엽콜리메이터 기능이 추가됐다.
암병원은 IMRT 도입으로 지난달 도입된 업그레이드 버전의 토모테라피와 함께 고정밀 방사선치료를 실현하게 돼 치료시간 단축과 양질의 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혁신적 암치료를 구현하게 됐다.



2015/08/19 14:32 2015/08/19 14:32
세브란스 로봇수술, 세계가 배웠다
세계 10개 대표 로봇수술기관 최초 24시간 릴레이 라이브 로봇수술


나군호 교수팀
로봇 전립선 절제술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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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로봇수술이 활성화 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 최초로 다기관이 참여한 24시간 로봇 라이브 수술이 진행됐다.
지난달 16일 오전 10시(유럽 현지시각)부터 17일 오전 10시까지 24시간동안 진행된 릴레이 로봇 라이브 수술은 각 기관의 로봇 전담팀이 분야별 로봇 수술을 실시간 영상으로 전송해 누구나 수술기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인터넷상에 공개됐다(http://wrse24.org/).
스웨덴의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와 미국 뉴욕 MT. 시나이병원, LA USC Keck 메디컬센터, 영국 런던 가이스병원 등 4개 대륙 10개 로봇수술 전문기관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에서는 세브란스병원 나군호 교수팀(비뇨기과학)이 로봇 전립선 절제술을 선보였다.
로봇수술의 경우 팀워크가 중요해 술기를 배워도 팀워크가 형성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수술이 어렵다. 유럽비뇨기학회는 로봇수술의 경우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세계 의과대학 10위권에 속하는 세계적인 의료기관으로, 로봇수술을 배우려는 의료진이 늘어남에 따라 팀워크가 중요한 로봇수술에서 세계적인 로봇수술팀의 수술을 소개하기 위해 이번 이벤트를 마련했다.
로봇 릴레이 라이브 수술은 카롤린스카 연구소를 시작으로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미국의 로봇 수술 선도 기관이 로봇 부분 신장 절제술과 방광 절제술, 신장 이식술을 비롯해 총 14건의 로봇수술을 선보였다. 나군호 교수팀은 이 중 12번째로 나서 로봇 전립선 절제술을 시행하며 세브란스의 최신 로봇수술 술기를 공개했다. 또 로봇수술 후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수술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도 마련돼 로봇수술에 대한 이해를 더했다.
나군호 교수는 "로봇수술 분야에서 세브란스가 세계적인 기관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며 "세계 정상급 로봇수술팀의 수술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로봇수술에 대한 다양한 수술 기법과 팀워크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2015/03/09 16:03 2015/03/09 16:03
“ 최초 서양의술 도입 세브란스 우리가 돕자”
1933년 후원회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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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최초로 서양의술을 수입시킨 남대문밖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부속병원(속칭 제중원)은 근래에 이르러 일년에 무료환자의 시료비가 7만원을 넘는 터이며 앞으로도 이것을 넘으면 넘었지 줄지 않을 터이나 이러한 민중과 직접 관계가 심각한 기관을 언제든지 그대로 서양선교부나 또는 남의 힘에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또는 교육기관을 우리가 돕자는 의미에서 세브란스후원회가 발족되었다.”
1933년 6월11일자 동아일보 ‘각 방면 유지망라 세브란스후원회 발기’제하의 기사 중 일부이다. 신문은 9일 에비슨교장 자택에서 열린 후원회에 임시의장 윤치호를 비롯해 후원회원이 130여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조병학 여운형 송진우 방응모 위대모 박용균 홍석후 심호섭 오긍선 등 당시 내노라하는 사회저명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기부금 또한 의학교육과 무료 환자 진료로 조선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기에 세브란스를 돕자는 열의가 높았다고 한다.
세브란스후원회는 276명이 참여하여 35,260원을 모금했다. 이 기부금은 1934년 12월에 총건평 233.4평의 기초학 교사 신축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세브란스후원회에 관한 내용은 1972년 발행된 의과대학 재정사에도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1929년 개교 44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동창들을 중심으로 모교애를 발휘해 외국선교부의 도움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학감이던 1회 졸업생 홍석후는 당시 연간 경상비 30만원 중 선교부 보조를 받는 18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12만원의 모금을 제안했다. 나아가 에비슨교장은 학교재단 기본금 100만원(현재 돈으로 3,000억원 규모) 적립 계획을 세웠다. 미주지역 모금을 중심으로 하되, 약 20만원 가량은 국내에서 모금하는 방안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에비슨 교장은 1931년 6월 미국을 방문했다. 언더우드, 헐버트, 이승만 등과 함께 각 교회를 돌며 Korea Campaign을 전개했으나 세계경제공황으로 예상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5/02/23 09:16 2015/02/23 09:16

최신 로봇수술기 다빈치 Xi 국내 최초 수술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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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로봇내시경수술센터가 지난달 29일 전립선암 환자(72, 남)를 대상으로 국내 최초로 최신 로봇수술기인 다빈치 Xi를 이용한 수술을 진행했다. 집도의는 의대 나군호 교수(비뇨기과학).
최신형 다빈치 Xi 로봇수술기(이하 Xi)는 기존 모델인 다빈치 Si(이하 Si)에 비해 기능면에서 대폭 업그레이드됐다.
로봇 수술 기구를 환자의 수술 부위에 설치하는 준비과정인 도킹(docking)이 간소화 됐고, Si에 비해 초고화질의 3D 영상 정보를 제공해 수술 부위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로봇 팔은 수술 중 복강 내의 어느 곳으로도 접근할 수 있도록 개선됐으며, 4개의 로봇 팔은 더욱 정밀한 수술이 가능하도록 길이가 길어지고 얇아졌다.
또 원하는 로봇 팔 어디에나 자유롭게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어 수술 집도의는 로봇의 위치를 조정하지 않아도 더 다양한 각도에서 수술을 진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수술 가능 범위가 확대돼 보다 넓은 영역에서 최소침습수술이 가능하다.
이번 수술에 앞서 로봇수술을 하는 의료진 15명이 다빈치 제작사인 미국 인튜이티브 서지컬 본사에서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9월 로봇내시경수술센터에 Xi 장비를 도입해 모의수술을 진행한 바 있다.


 

 

 


 

2015/01/08 14:59 2015/01/08 14:59

첫 G2G 사우디 의사 연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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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알감디 에삼(알야마마병원)과 아불하산 칼리드 쉐이크(킹파하드병원) 그리고 라미 사이라피(시큐리티포시스병원) 연수의가 14일부터 외과 김남규 교수, 진단검사의학과에서 김현옥 교수, 그리고  비뇨기과의 나군호 교수의 지도하에 임상연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번 연수는 국내 최초의 사우디 G2G(정부간 거래) 의료진 유료 연수로 세브란스의 교육 노하우를 통한 첫 공식 교육 비즈니스 사업으로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삼과 쉐이크 연수의는 이날 아카데미팀을 방문해 가운을 전달받고 연수에 앞서 소감을 밝혔다.
에삼은 “한국 병원의 첨단시스템과 최신 의술에 관심이 많다”며 “세브란스에서 배울 수 있게 돼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쉐이크는 “나 자신에 대한 세브란스의 기대와 세브란스에서 연수를 받도록 지원해 준 사우디의 기대에 충족할 수 있도록 열심히 배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들은 한국에서 연수를 위해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1개월 사전교육을 마쳤으며, 2개월의 병원 사전교육을 마친 후 1년간 연수를 받게 된다.
한편, 세브란스는 한국과 사우디의 G2G 유료연수 사업에 국내 5대 병원중 하나의 참여기관으로 선정됐으며, 사우디 의사들은 세브란스의 선진화된 의료기술과 의료진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며 다른 병원보다도 먼저 연수를 희망해 이번 유료연수를 진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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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3 09:50 2014/07/2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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