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여 년 세브란스의 역사를 만나다
3-김건배 화백 유화작품 13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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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단발하는 에비슨 박사 (1895)
1895년 내려진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팅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이승만은 에비슨과 함께 조선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얼마 후 이승만은 에비슨의 집에 찾아와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이승만의 요청을 받은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를 자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이승만은 잘린 상투를 거즈에 싸서 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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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을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1919)
1919년 3월 1일, 일제 지배의 부당성에 항거하는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세브란스의 교수, 학생, 직원들도 모두 적극 참여해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세브란스병원의 약국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은 최연소자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3·1 운동과 관련해 세브란스 학생들은 세브란스병원 외래 진료소 4층에 있는 암실에서 독립선언문을 찍었다. 일본 경찰이 병원을 수색하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관련 증거들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겼다. 이때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지방에도 전해져 만세운동에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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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귀환 동포를 구호하는 세브란스 학도대(1945)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국내외에서 징용, 징병 됐던 수많은 동포가 귀환했다.
학교가 서울역 앞에 위치해 귀환하는 동포들을 자주 보게 된 세브란스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동포들이 굶주리고 헐벗은 상태에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이에 학생들은 서울역에 세브란스 역전 구호소를 설치하고 귀환동포를 위한 음식제공, 진료, 서울역 주변의 청소와 질서 확립 등의 활동을 벌였다. 급한 질병을 치료하고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귀환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울역 당국과 협의해 무료승차권도 발급해줬다. 또 건국준비위원회와 서울시청을 방문해 전재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머무를 동안 제공할 식량과 옷가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세브란스 학생들의 이러한 활동은 세브란스의 봉사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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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의거에 나선 연세의대생들 (1960)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됐다.
특히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의 무력진압은 더 큰 반발을 불러왔고, 의과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서 독재정권 퇴진을 외쳤다. 시위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의예과 2학년 최정규 학생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됐다. 최정규 학생에게는 이후 명예 의학사 졸업장이 주어졌다. 또한, 시위 현장에서 부상당한 많은 학생이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으로 몰려들어 이내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
그래서 학생은 물론이고 기초의학 교수들까지 모두 나와 밤을 새워가며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2017/08/07 13:49 2017/08/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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