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의 스승 김기호 선생님을 기리며
김병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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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의 가족 여러분은 물론, 특히 선생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큰 도움을 베풀어 주시여 의학계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제자들의 애도를 뒤로 하시고 지난 11월 28일에 영면하셨다.
뒤돌아보면 어제 같은데 선생님께서 모교 세브란스에 부임하신지 60년이 되셨는데, 이 시기는 선생님께서 각고의 고난을 인내하시고 오직 학문과 모교에 대한 소명감으로, 자기 직분은 모교 세브란스를 세워주신 스승님들의 뜻을 이어가시는 길이라고 믿으신 기독교 신앙으로 가능하였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7년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결핵병사와 세브란스항결핵회(내과교수이셨던 F.M. Stites 선교사가 1920년 설립)의 역사를 이어온 흉부클리닉에 근무하시면서, Ernest B. Struthers 교수님이 World Church Service Tuberculosis Control Project 의 원조로 가난한 결핵환자를 Ambulatory treatment program으로 큰 성공을 거두시는데 공헌을 하시던 때였다. 이때는 미국 독지가 Linus H. Bittner씨가 보내준 이동진료차(Mobile Hospital)로 오지에 사는 결핵환자도 진단해 주고 약을 무료로 공급하여 치료하였다.
그 당시에 외과교수로 세브란스를 크게 도와주신 Kenneth Scott 교수님의 회고록에 의하면 15,000명 환자를 Ambulatory 흉부클리닉에서 완치시켜 주었다고 하신다. Struthers 교수께서는 중국에서 산동성에 있는 Cheeloo University Medical College in Jinan에 교수님으로 봉사하셨던 훌륭한 선교의사로, 선생님은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모교에서 선교사로 가시기 위해서 위생학박사(D.P.H)를 받으시고 일생 해외 선교를 하시게 되는데 한국전쟁 후에 비참한 우리나라 결핵환자를 관리하는 선교부의 project인 World Church의 선교기금으로 한국의 결핵의 심각성을 아시고 파송을 받으시여 World Church Tuberculosis project 원조로 흉부클리닉을 설립해서 한국 최초의 Ambulatory TB treatment 정책을 성공하시므로 우리나라 정부에서 국가결핵퇴치사업을 결정하게 되고 그 정책 수행을 위해서 대한결핵협회, 대한결핵학회로 계승하게 된다.
그 당시 통계조사를 보면 인구의 2%가 활동성 결핵을 앓고 있었고, 정부도 아무런 치료대책을 갖고 있지 못하고 몇 곳에 결핵요양소가 있었으나 항결핵치료제가 없어서 격리시설로 인식되어 결핵 퇴치에는 역할을 못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처음 나온 스트랩토마이신이 있었으나 대단히 고가이고 곧 내성이 발생하였고 1949년 파스, 1952년에 이소니아지도(아이나)가 개발되어 선진국에서는 3제 병합요법으로 결핵환자 완치에 획기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Struthers교수님이 미국 구호원조를 받아오시어 세브란스병원 흉부클리닉에서 외래치료 중심으로 새로운 병합요법으로 그 많은 환자를 돌보실 때, 선생님을 모시고 김 선생님께서는 모든 어려운 고난을 감당하시며 고생을 하시었다.
김선생님은 1942년도에 세브란스 졸업(47분의 동기생)하시고 일제시대 경성제대에서 이또오교수 지도하에 결핵을 전공하시고 1944년부터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 내과 조교수로 특채되어 근무하시게 된다. 선생님께서는 대단히 미남이시고 성격도 온화하시고 항상 남을 배려하시는 인품으로 광복 이후 교수인력의 부족으로 많은 분야에서 기회가 있었으나, 결핵을 계속 전공하시므로 의학계서 많은 활동을 하시게 된다. 1942년 당시는 결핵에 대해서는 치료방법이 없던 시대로 비인기학문이었으나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로서 그 질병을 맡아 하는 선구자가 필요한 시대였다.
많은 동기생들이 택하는 수련 이후에도 인기 있고 개원해서 부자 될 수 있는 길을 거부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의 소명감에 나는 지금도 감탄한다.
그 당시 결핵퇴치사업은 선교사 출신 전문가가 맡아 하시니, 자연이 머리가 명석하셨던 김선생님께서는 그분 들과 일하시면서 영어를 잘 하시게 된다. 1953년에 신생 대한민국에서 제 1회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시여 미국으로 유학가시게 되는데, 미국주립레이부룩병원 내과 레지던트(내과)를 하시는 과정과 동시에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조교수로 있다오신 경력을 인정 받으시어 유명한 Trudeau Institute에서 결핵에 치료는 물론 전문의 과정을 수료하시게 된다. Trudeau Institute는 1884년 설립된 대단한 연구소로 처음에는 인류에 제일 공포질환인 결핵연구와 교육을 주로 하였으나, 현재는 감염질환은 물론 암, 면역질환, 백신 연구 등으로 박사후과정 연구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교육연구기관이다.
우리 모교에 결핵치료 프로그램을 정착시켜주신 Struthers교수님도 이 연구기관 출신 김선생님의 동문이시다.
고단한 연수생활 중에도 이기관과 자매기관인 명문 Columbia 의과대학 흉부질환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시고 귀국 하시게 된다. 이때 선생님께서는 미국흉부학회(American Thoracic Society) 회원으로 위촉 받으시게 된다.
큰 뜻을 갖으신 선생님께서는 서울여자의과대학 이갑수 교수님이 교수로 오시라고 요청했으나, Struthers 교수님 모시고 일하고저 좋은 여건을 버리시고 1955년부터 세브란스 흉부클리닉에 근무하시게 되는데 처음에는 내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으셨다.
선생님이 모교에 오실 때는 내과가 이내과 (이보영교수님:소화기내과) 조내과 (조광현교수님:심장내과) 서내과 (서석조교수님:신경·내분비내과)로 구성되어 그 분들 지도하에 수련의 과정을 맡으신 몇 분이 전임강사로 계시며 철옹성 같은 고정관념으로 가장 중요한 내과 전 과목을 강의하셨다.
김선생님은 흉부클리닉에서 Struthers 교수님 모시고 고생을 그렇게 하시는데 부임한지 4년이 되어 흉곽내과가 설립되며 1959년에 내과 조교수로 승진하시게 된다.
선생님께서는 손수 저술하신(타이프를 치시여 제작) 결핵학교과서로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시므로 결핵완치의 개념을 전수 하시었다. 이때 좋은 영향을 받은 나의 동기생 이원영 교수가 결핵을 미국에서 전공하고 1969년에 김선생 모시고 열심히 하고 김성규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이 호흡기내과를 전공하시게 되는데, 내가 교수 재직시는 제일 우수한 졸업생들이 호흡기내과학을 지망하여 호흡기내과가 대단한 교실로 발전하였다. 이제는 폐암이 곧 남자의 제 1위가 여자에게는 제 2위의 암사망원인이 되니, 세계적 수준의 호흡기내과로 발전하게 된것이 우리 모교의 큰 발전의 힘이 되니 이 모든것이 김 선생님께서 먼 앞날을 보시고 일생 고생하신 헌신의 결과이다.
그 당시 호흡기질환은 내과에서 선생님께 강의를 드리지 않고 심장질환을 전공하신 서정삼 조교수에게 하게 하였으니, 그 때 선생님 감당하신 마음고생을 제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그 당시 흉부클리닉이 세브란스 본관 옆 건물로 1층에는 도서관이 있고 그 위층에서 진료를 하셨는데 대단히 많은 환자가 전국에서 내원하여 바쁘게 지내셨다.
이 건물은 세브란스 선생님이 우리 병원을 1907년에 방문하시게 되는데, 자기 기부한 $23,000로 훌륭하게 건축되고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시고 추가로 $30,000을 기부하시여 대로변에 의과대학건물로 1912년에 준공하여 의과대학으로 사용하다 Avison관이 건립 이후에 이전하므로 흉부클리닉을 Struthers 교수님이 설립하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퇴치의 기관으로 된다. 이에 계속해서 6·25 동란 이후 파괴된 모교는 김명선선생님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미8군의 도움으로 복구가 되며, 그 후에도 미8군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세브란스 발전에 전환점인 The 8th Army Memorial Chest Hospital을 신촌에 건축하게 된다. 당시 동양 최고의 병원시설인데 7,500평으로 흉곽병으로 50%를 사용하도록 계약했다.
미8군 의무감이 매번 병원방문시 Struthers교수님, 김선생님의 운영하시는 흉부클리닉의 중요성과 우리나라 결핵환자의 어려운 처지를 인식하여 새 병원에 말씀드린 조건이 필수적으로 반영하게 된 것이다.
Struthers 교수와 김 선생이 바쁘시나 결핵을 전공한 의사를 모셔오기 힘드는 상황인데, 선생님의 지도 받은 함성숙 선생님 (부교수직으로 퇴임하셨다) 다른 선생님은 김형덕, 최용옥 선생님이 결핵전문 staff로 고생을 하셨으나 내과 발령을 주지 않아 고생만 하시다 중간에 내보내게 되니 김선생님의 마음고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이제 포용하는 미래발전 방향을 세워야 한다.
그 당시 김선생님의 대학동기생이 주임교수가 되고, 대학 9년 후배가 주임교수로 10년 이상 내과학 교실을 좌지우지 할 때 선생님은 자기 하실 일만 하시면서 세브란스를 대표한 대외활동으로 누구나 존경하는 지도자로 한국의학의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하시였다.
대한결핵학회회장(1971년), 대한의학회부회장(1973년), 대한의사협회부회장(1974년), 제4차아시아태평양흉부질환학회(APCDC)대회장(1974년), 대한결핵협회장(1979년), 대한내과학회장(1980년)으로 세브란스의 대표적인 의학계 지도자로 활동하셨다.
교수정년제 실시로 10년동안 주임교수이신 최흥재 선생님이 임기가 끝나시니 1984년 주임교수로 취임하시여 퇴임하실 때까지 내과의 Subspeciality의 독립성이나 각 학문의 특수성을 진작시켜 주시게 된다. 필자도 1974년 미국에서 연세암센터에 일하라고 그당시 총장님, 부총장님, 학장님을 비롯한 스승님들의 부름으로 귀국해서 일하게 되는데, 세브란스의 경직된 조직운영으로 흉부클리닉을 위해서 김 선생님께서 겪었던 고생을 나 자신도 경험하게 되니, 선생님에게 대한 스승으로 모시는 마음이 깊어간다.
김선생님께서 주임교수 되시고 저의 어려운 사정을 깊이 이해하시고 많은 도움을 주시고 연세암센터에도 몇 명의 교수요원을 보내주시어 발전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이때 노재경교수, 김주항교수를 연세암센터 전임으로 보내주시어 종양내과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 후에 정현철교수 Fellow를 5년 하고 1994년에, 라선영교수가 연구교수로 진료여부도 허가받는 고생을 하고 2007년에 종양내과 전임교수로 허락되어 발전하게 되며, 연세암병원에서 열심히 연구와 Multidisciplinary 개념으로 각과와 협동하여 암환자를 돕고 완치시키게 된 것을 항상 나는 감사한다.
필자 혼자 일할 때 함께 많이 고생한 고은희 선생이, 인사위원회에서 사직으로 결정하고저 할 때 내가 동기생 김일순 학장님께 사정해서 조교수 발령을 받게 했으나, 끝내 퇴직하게 되는 가슴아픈 생각을 하니 더욱 선생님을 그리게 된다.
미국에 귀국한지 40년, 이제 80을 바라보는 이 늙은 제자가 복이 많아 지훈상, 박창일 의료원장의 비전으로 연세암병원이 세워지기까지 많은 세브란스병원 교수들이 인내하고 도와주신 것도 전부 김선생님 같은 훌륭한 스승이 지도한 나의 제자들이다.
연세암병원에 제일 중요한 폐암전문센터를 보시고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이 늙은 제자는 머리 조아려 감사하게 된다.

참고자료
(1) Severance 100년사
(2) Kenneth M. Scott 한국선교사
(3) 자문교수
 의사학과 여인석교수
 호흡기내과 장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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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16:42 2014/12/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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