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내가 영화를 보는 기회는 가끔 ? 여기서 가끔이란 의미는 1년에 0.5편 정도로 거의 가뭄에 콩 나는 정도의 수준이다. ? 뿐이다. 그나마 주말의 명화나 케이블 방송에 의존한 것이다. 내 집에는 거실에 TV가 없고 안방에 (심심할까 봐) 미국에서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구닥다리 17 인치짜리가 하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케이블 방송을 연결하지 않고 있어서 집에서는 볼 기회가 없고, 수술실 교수 갱의실에 비치된 TV에서 보는 것이 다다.

 

우리 병원에서 제공하는 케이블 방송에는 영화를 보여주는 채널이 3개쯤 되었었는데, 어느 순간 경비절감이라나 뭐라나 하는 이유로 단 하나의 방송만 살아 남았다. 내게는 환상적인 O*N 채널이 바로 그것이다.

수술을 하는 날에는 수술 중간에 마취를 깨우고, 다음 환자를 준비하는 시간이 20분 정도가 있어서 조금 여유가 있다. 그 시간을 대부분 외과 (및 수술실을 이용하는 기타 잡과(?)들도.) 의사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용을 하게 된다. 이 시간은 의외로 집중이 잘되는 시간이라 논문을 검토하거나, 발표 준비, 집필 등등에 쓰는 것이 대부분인데, 사람이 하루 종일을 그렇게 하고는 못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물론 아침 댓바람부터 그러는 분들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후쯤 되면 지친 교수들이 하나 둘 TV 앞에 모이게 된다. 어르신들은 (그런 걸 왜 보는지 참 짐작하기 힘든 일이나…) 주로 골프체널, 바둑 등등을 보시기 때문에 나같이 무명소졸들은 오후까지도 초반에는 소파의 편하고 view가 좋은 좌석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고 (그러나 뭐 그닥 그런 프로그램들이 땡기지도 않아서 아쉽지는 않다.) 좀 더 늦은 시간이 되어서 높으신 분들의 스케줄이 끝나면 그제야 비로소 리모컨을 쥘 수 있는 순서가 온다. 이때가 바로 내가 그 유명한 O*N 채널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채널이 문제가 많음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선전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점은 또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지, 뭔가 조마조마할 때 뚝 끊어서 잡스러운, 그러면서도 무지 시끄러운 보험 선전 같은 것을 끝도 없이 퍼부어 댄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어떤 한 영화를 시작하면 한 5-6주는 연속으로 같은 시간대에 틀어 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정말 끝도 없는 것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 치명적 결점 때문에 나는 이 방송을 좋아한다. 나처럼 일정 시간을 연속으로 진득하게 앉아 영화를 감상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 방송처럼 일정 기간 동안 진절머리 나도록틀어 주어야 시간에 쫓겨 난잡하게 토막 날 수 밖에 없었던 조각난 부분을 이어 붙이고, 반복적인 감상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영화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별로 의도한 것은 아니나 영화 하나를 보아도 아주 심도 있게파악할 수 있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역시 공부는 반복이 최고 아니겠는가?)

 

(…. 뭔 서론이 이렇게 길어지는지, 벌써 A4 용지 1장이 넘었군….)

 

 

최근 이 고마운채널에서 내가 리모컨을 쥘 때쯤 보여주는 영화가 오늘의 제목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책의 저자는 내 글 무림입문에 잠시 등장했던, 자신의 글이 99.7% 진실이라 말했다는 로렌 와이스버거,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탄탄한 구성과 흥미, 그리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메릴 스트립의 카리스마 ? 그녀의 은발과 싸늘함, 그리고 표정 하나 하나에서 넘쳐나는 카리스마는 가히 압권이다. 그녀가 왜 대 배우인지 잘 알게 하는 부분이다. ? 그리고 세련미 넘치는 앤 해서웨이, 바로 뉴욕 자체의 모습이랄까? (내 나름 뉴욕출신 -정확하게는 뉴욕 교환교수 출신-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명작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모든 직원 위에 군림하는 미란다는 여러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일 정도로 능력 있고, 판단력, 결단력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자이지만, 약간은 새디스트라 할 정도로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가차 없이 해고하는 등 가히 악마 같은 여자다. 뿐만 아니라 능력 없는 자를 경멸하고, 심지어 스타일 없는 여자는 쓰레기 취급을 하는 전형적인 속물 근성까지 골수에 박인 그런 밉상이다.

원래 정통지의 기자를 꿈꾸던 에디는 이 런웨이라는 속물스런 패션잡지의 (그러나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어렵다는.) 편집장 비서가 된 후 온갖 힘들고 잔인한 오더와 학대를 경험하고, 이런 일들에 치여 친구들과 애인까지 멀어지게 되지만, 어리석고 잔인하며 속물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stylish한 그 세계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미란다를 동경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워낙 실력이 있던 지라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에 점점 더 깊이 발을 들이게 된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어떨지 모르나 그 정글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권모술수와 비인간적인 모습들에 철저히 실망을 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약속되었던 미래의 그 화려함을 모두 버리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화려한 명품이 난무하고 (난 사실 뭐가 명품스러운지 영화를 아무리 자세히 봐도 잘 모르겠더구만…) 소위 스타일에 목숨 건 (멋진) 여자들이 화면에 가득한 그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좀 다른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미란다, 바로 메릴 스트립이다. 악마 같은 그의 개성과, 싸늘함, 그리고 어마어마한 무게로 다가오는 권위. 예쁘고 가여운 신데렐라앤 헤서웨이와 대척점을 이루며 영화의 긴장감을 돋우는 그의 개성은 정말 누가 보아도 압권 그 자체다. 처음엔 가엽고 예쁜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매료 될지라도 결국엔 악마성에 빠져들고 마는 그런 개성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 은발의 카리스마에서 읽은 것은 고독이었다. 최정점에 선 그녀에게는 일과 가족이라는 발판이 있었고, 일에서 만나는 동료나 경쟁자들이 있어 오히려 북적거린다 할 정도로 군중 속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녀의 기본 무드는 바로 고독이란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를 지탱해 온 것은 모질음과 철저함이었고, 남의 눈을 의식해 조금의 빈틈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강박적인 신조였다. 그런 세월이 지나면서 그녀는 성공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지독한 마녀라는 정평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에게 모진 것과 마찬가지로 후배들에게도 엄격하고 지독하기 때문에 얻은 악명이지만 그 때문에 그의 휘하에서 자란 사람들은 어디서나 번듯한 한자리를 꿰어 차고 능력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나 동료들은 그를 마녀로만 보는 것이고, 인간미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역시 또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마음을 열 수 없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 나이가 좀 들었다. 점점 윗사람들 보다 아랫사람들 숫자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내가 지난 시간 지내오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인화(人和)였다. 우리 사회가 과거에는 어땠을 지 몰라도 적어도 시간이 흐른 만큼은 진화가 되어야 하고, 만약 그게 어렵다면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뭔가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속한 집단에선 그 어떤 것보다도 인화를 강조해 왔던 것이다.

다소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적어도 인간의 본분에 대한 교육이 되어 있는 사람을 더 높이 쳐 왔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내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외인구단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의대에서는 성격이 좋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좀 포기해야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동료나 후배들이 보기에 나는 성격은 좋은 편이나너무 물이다라는 평가를 주로 받았다. 능력도 그만치 없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후배들도 다 하나의 인격체이고, 가정에서는 하늘 같은 가장인데 그들이 내가 난리를 친다고 더 잘하고 그렇지 않다고 대충할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후배들을 놔 먹이는것 같지만 그들을 평가하는 눈이 없다 할 것인가?

속이 썩어도 기다리는 것이지.

 

참다 안 되면 정말 1년에 두, 세번 폭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어쨌든 그들과 잘 지내고 솔직하게 서로 생각을 교류하려 애쓴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내가 주로 차용하는 방법이 회식이다. 준비하고 예약하고 그런 정규 회식이 아니라 비정기적이며 번개같은 회식을 하면서 솔직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응어리진 것이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서로 털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러자는 것이다. 그들도 과연 그런지 정확히 자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 회식이 전과는 달리 점점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재미있고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던 이 시간이 점점 힘들어지고, 지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허탈하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젠 내가 점점 말하지 못할 것 들이 많아진 때문인 것 같다. 후배들이나 (그들을 제자라 생각하지 않고 후배라 여기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제자를 거둘 만큼 시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전공의들과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고 어울리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막 나가는 모습을 단순한 농담으로 넌지시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참아내기에 부족하고 점점 힘들어진 까닭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어느새 내가 해야 할 일 만으로도 벅찰 정도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가 된 것이다.

비록 과거 내가 생활해 왔던 것과는 다르게 그들에게 대해주고 싶어했기에 지금도 그들이 자발적으로나서준다면 모를까 좀처럼 요구하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자발성은 정말 가뭄에 콩이 나는 과학적으로 힘든사건 보다 더 확률이 낮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유의한 결과임을 잘 알 수 있다.

 

기다려야 하나, 그들의 인식에 뭔가 그 어떤 금속성분이 좀 들어 찰 때까지?

아니면 은발의 그녀, 메릴 스트립 같은 자세가 필요할까? 그런 카리스마와 독한, 그리고 악질적인 귄위가?

적어도 나는 그런 보스가 되지 않으려 지금까지도 노력 중이었다. 심정적으로는 가끔 그러고 싶지 않은 적도 없었다고는 못 하지만….

 

 

휴우…..  어느덧 프라다를 입을 철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때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그나 저나…. 내게 프라다가 있긴 하던가?

2012/12/27 17:19 2012/12/2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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