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Story


간 이식의 새로운 이정표 세워가는 명품 이식팀의 좌장, 김순일 교수
추락하는 환자를 낚아채 끌어올리는
마지막 생명지킴이


다른 장기들처럼 간 역시 평소에는 30% 정도의 파워로 정상적인 삶을 지탱하다가 몸이 아프다든지 무리하게 몸을 혹사하는 비상 사태가 생기면 비축했던 70%를 총동원해서 대처한다.
그런데 그 능력이 5-10%로 떨어지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식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지 않는 한 생명 유지가 힘들어진다. 바로 그 지점이 김순일 교수가 개입하는 자리다.
에디터 최종훈 | 포토그래퍼 이정민





 간은 사랑을 닮았다. 사랑은 나누면 갑절이 된다. 간도 마찬가지다. 65%를 잘라서
내주어도 일 년이 지나면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간이 모두 본래의 크기를 되찾아 갑절이 되기 때문이다.

 몸을 지탱하는 거대한 화학공장, 간. 혈액 속의 유해성분을 걸러내고 영양분을 보관하거나 다른 물질로 변환하는 등 300여 가지가 넘는 기능을 감당한다. 생명력도 강해 절반 넘게 잘라내도 1년 뒤에는 본래 모습을 완전히 되찾는다. 그렇다고 무한정 학대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간세포가 파괴되는 속도가 재생력을 웃도는 순간부터 서서히 문제를 일으킨다. 간 기능이 30% 아래로 떨어지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5-10% 대에 이르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그쯤이면 이식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지 않는 한 살 길이 없다. 김순일 교수는 바로 그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환자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마지막 수비수다.


낭떠러지에 몰린 생명들의 지킴이
 회복하기 어려우리만치 간이 망가진 환자들에게 이식은 ‘죽음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거기엔 천하의 명의라도 어쩔 수 없는 전제가 있다. 건강한 장기가 준비되지 않으면 환자의 사정이 아무리 안타깝고 의사의 솜씨가 한없이 탁월해도 뾰족한 수는 없다.

 이식에 필요한 장기는 뇌사자에게서 얻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숫자는 턱 없이 부족하다. 대한이식학회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도 5천 명이 넘는 환자들이 순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공여가 이루어지는 사례는 350여 건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나머지는 생체이식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절차는 생각만큼 까다롭지 않다. 혈액형을 비롯해 웬만한 장애물들은 다 걷어낸 터라 건강한 공여자의 건강한 간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단 힘겨운 고비를 넘어 이식이 이루어지면 그 파급 효과는 환자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제 환자 가운데,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에게 아들이 간을 준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재활도 잘됐습니다. 예전처럼 트럭 운전을 해서 당신 말마따나 약값과 병원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정도가 됐지요. 환자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부인은 마음 놓고 생업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건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소 닭 보듯 하던 부자는 연인만큼이나 가까워졌습니다. 한 집안이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되살아난 겁니다.”

 그런 계산법이라면 김순일 교수의 손을 빌려 죽음의 그늘을 걷어내고 빛을 본 이들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이미 400례가 넘는 간 이식 수술을 마쳤고 금년에도 120건 이상을 무난히 성사시킬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문적 기술적 역량이 커지면서 그 혜택의 폭과 깊이도 점점 넓어질 뿐 아니라 깊어지고 있다. 올 1월에도 난이도가 최상급에 해당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쾌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여러 차례 강력한 항암 치료를 받는 바람에 간이 심각한 상태로 모두 망가진 환자였어요. 게다가 생체간 기증자와 혈액형이 달라 수술 전에 혈액형에 대항하는 항체를 걸러 없애야 하는 아주 어려운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수술 난이도가 워낙 높고 위험 부담이 컸지만, 이식팀은 물론 관련 분야의 선생님들과 상의한 끝에 이식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개복해보니 상황은 매우 심각해 간 이식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거의 모두 괴사되어 주위 조직과 한 덩어리로 엉겨 붙은 간을 떼어낸 후 막힌 혈관을 모두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여된 간의 정맥은 혈관을 여러 개 사용해 새로 성형하고, 혈전이 들어찬 문맥도 5cm 정도 잘라내고 냉동 보관했던 뇌사기증자의 혈관을 사용해 중간을 이어 붙였습니다. 수차례의 항암 색전 치료 후 완전히 막혀버린 간동맥 역시 환자의 대장 동맥 일부를 잘라내 중간을 이어주었고, 마지막으로 공여간의 담도를 환자의 소장에 이어줌으로써 수술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항체를 걸러내야 하는 어려운 치료와 함께 고난이도의 수술 네 가지를 동시에 진행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오랜 기간 축적해온 기술과 이식팀이 쌓아 온 팀워크로 결국 해결해냈습니다.”

 ‘보람’이라는 말로 축하 인사를 건넸더니 ‘감사’로 수정해 받는다. 그렇게 시도해볼 기회를 얻었으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얘기다. 환자와 의사, 일과 삶을 생각하는 김 교수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들 간 이식은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다. 병원비가 일억은 훌쩍 넘길 거라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세브란스병원에선 그런 선입견에 매일 필요가 없다. 그 삼분의 일 정도면 공여자와 수혜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둘러 가는 듯 보여도 더 빠른 길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환자를 상대하는 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김 교수라고 예외일 리 있겠는가? 그 역시 ‘뒷골 땡기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름만 들어도 험난한 앞날이 보이건만, 어쩌자고 그는 덥석 이 길에 접어든 걸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교수의 대답은 ‘섭리’였다.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여기 까지 왔다는 말이다.


 소시적 스스로 설정한 진로는 치과 의사였다. 록 밴드 싱어로 활동하면서 설렁설렁 공부해도 성적이 잘 나오던 터라 결과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낙방이었다. 노력하지 않고 교만했던 자신을 다그치며 일 년 동안 땀을 쏟았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의사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첫 번째 진로 변경이었다.

 연세대 의대에 다니면서도 훗날 학교에 남는다든지 커다란 병원에 남을 계획은 아니었다.

 무의촌에 들어가 일과 삶의 즐거움을 함께 찾는 쪽에 더 끌렸다. 다만 한 번쯤은 넓은 물에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미국 의사 자격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본과 4학년을 마쳐갈 무렵, 외과 쪽의 제안을 받았다. 지금 외국에 나가봐야 별 볼일 없으니 일단 여기서 외과 수련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였다. 혹해서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두 번째 전환이었다.

 세 번째 터닝 포인트는 전문 분야를 결정할 때 왔다. 군 생활을 마치고 지방으로 가려던 참에 은사 이경식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일반외과와 이식외과 가운데 한 분야를 골라 강사 과정을 밟으라는 통보였다. 김순일 교수의 선택은 후자였다. 아직 불모지에 가까웠지만 공부하며 앞길을 열어가 보고 싶었다. 예상대로 고생문과 통하는 험로였다. 새벽별을 보며 집에 들어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아내와 아들아이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에서 맞닥뜨린 건 세브란스에 남을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결정이었다. 속이 쓰렸다. 그때까지는 그게 축복의 시작인 줄 새카맣게 몰랐다.

 “한 달 하고도 보름쯤 지났을 때 은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난데없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가서 임상강사로 일할 기회가 있는데 가보겠느냐는 겁니다. 단순한 연수가 아니라 강사 신분으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어요. 그러자면 미국 의사시험도 다시 봐야 하고 영어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외래에 앉아 저녁 아홉 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신촌에 있었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거예요.”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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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생활은 고달팠지만 열매는 달콤했다. 2년간 이식외과 임상강사로 일하면서 고난이도의 이식 수술이 있을 때마다 불려다녔고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계속 교수로 남아 같이 일해 보자고 먼저 재계약을 요청해올 만큼 인정도 받았지만 그는 고국의 환자들을 선택해 귀국을 결정했다. 미국에 갈 때는 신장 이식만 할 줄 알았지만 돌아올 때는 국내 최초로 신장은 물론이고 간과 췌장까지 모두 이식 수술이 가능한 의사가 되어 있었다. 타이밍이 달랐을 뿐 하나님은 본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물을 주셨다.


명품과 ‘짝퉁’은 마무리에서 차이가 난다
 세브란스로 돌아온 뒤에도 김순일 교수의 분주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훈련된 인력이 없는 탓에 공여자의 간을 떼어 수혜자에게 옮기는 수술의 전 과정을 혼자 처리했다. 얼마 뒤부터 최진섭 교수가 한 쪽을 맡아주었지만 손 하나 보태는 건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었다. 당장 이식 수술 건수를 늘리는 것보다 전문가를 길러내는 게 급선무였고 최진섭 교수의 적극적인 후원과 조언을 받아들여 일부러라도 후배들에게 수술을 맡기기 시작했다. 물론 뒤 에 서서 지켜보기를 잊지 않았고 주치의 역할도 나눠주었다.

 책임이 크면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게 마련이다. 차츰 함께 손발을 맞출 팀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둘이 빠져도 넉넉히 수술을 감당해낼 만큼 자리를 잡았다.

 다른 과의 동료 교수는 자신의 환자에게 간 이식을 권하면서 김 교수의 의료진을 ‘명품팀’이라고 소개했다. 오랜 세월 공들인 결과가 주변으로부터도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명품팀의 좌장 김순일 교수라도 모든 환자를 다 살려내지는 못한다. 한동안은 그 점이 스트레스가 되어 그의 목을 죄었다. 침상머리를 붙들고 기도를 해도, 중환자실을 지키며 밤샘을 해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환자가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생명을 세상에 보내는 것도, 다시 데려가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다. 큰 매듭 하나가 풀리는 경험이었다. 의사의 몫 이상을 붙들고 고민하는 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행위였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의문이 다 풀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게 그분의 몫이라면 내 발버둥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루는 수술을 마치고 샤워실에서 나오는데 맞은편 벽에 해적선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르는 거예요. 이식외과 강사로 일할 때, 아이랑 좀 놀아주라는 아내의 채근에 밀려 레고 벽돌로 만들어준 거였어요. 아직 어렸던 아들 녀석은 금방 싫증을 내는 바람에 저 혼자 쏟아지는 잠과 싸워가며 조립했었죠. 그런데 갑자기 그 모습이 왜 떠올랐을까요? ‘최선을 다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데까지가 너의 몫이고 상’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조립 방법이 그려진 도면을 같이 보면서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배를 완성한 후 아이가 만든 것으로 인정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제가 일한 모든 것을 ‘제 작품’으로 인정해주시겠다는 거죠.”

 정 성을 다해 수술하고 치료한 환자를 잃는다는 건 여전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김 교수는 다르게 반응한다.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대신 가족들의 아쉬움과 환자의 생전에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씻어주고 상처를 다독이는 데 더 힘을 쓴다. 보호자와 의사가 함께 온 힘을 기울였다면 인간의 도리는 다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품과 이른바 ‘짝퉁’은 마무리에서 차이가 난다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남은 이들의 심정까지 헤아리는 김순일 교수의 이식팀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인지 모른다




| 김순일 교수 |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 년부터 연세의대 외과학교실에 재직중이다. 전문 진료 분야는 장기이식으로 간장, 췌장, 신장 이식 모두를 시행하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생명잇기의 상임이사, 대한이식학회 장기기증활성화위원장으로 건전한 장기기증 문화의 정착과 활성화에도 힘쓰고 있다.



2012/05/17 13:43 2012/05/1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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