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_에스토니아, 라헤마국립공원

늪, 각질 아래 고인 물은 여전히 고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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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행의 속성이 신기하고 낯선 무언가를 쫓는 데서 세월의 흔적을 더듬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젊고 반짝거리는 녀석들을 지나쳐 늙고 때 묻은 친구들에게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낍니다. ‘신삥’ 쇼핑센터를 지나쳐 허름한 그릇가게를 넘보고, 빛 밝은 갤러리의 색 고운 그림을 외면하고 어두컴컴한 성당 구석을 장식한 침침한 벽화들을 눈으로 쓰다듬습니다. 그러고도 양이 차지 않으면 시간의 먼지가 차곡차곡 쌓인 숲으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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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름세

#1

숲으로, 늪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여염집보다는 품위가 있고 ‘궁’이라 부르기엔 몸집이 작은 저택에 들릅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의 집으로 18세기 건축물이랍니다. 고가구나 은제식기 따위보다 가운데가 움푹 팰 만큼 닳아빠진 계단 턱, 손을 타 반들반들 윤이 나는 계단난간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세숫물, 잔치음식, 술잔, 옷가지 따위를 들고 아래위층을 부지런히 오갔을 옛 하녀, 하인들의 잰 몸놀림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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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채 뒤편, 제법 너른 호숫가로 대장간과 증류장이 있습니다. 술이라면 냄새도 싫어하는 터라 가볍게 제치고 곧장 대장간으로 들어갑니다. 빈집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대장장이 아저씨가 숯불을 피워놓고 칼을 벼리고 있습니다. 모처럼 들어온 손님이 반가웠는지 이것저것 솜씨를 과시하더니 망치를 건네주며 얼마나 무거운지 보랍니다. 마음은 도리질을 치는데, 예의 바른 손이 제멋대로 나가서 세월 묻은 망치를 받아 듭니다. 동방예의지국 출신은 외국에 가도 티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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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헤마국립공원

#3

옛 농가를 개조한 식당에서 옛 맛이 나게 조리한 음식으로 점심을 먹습니다. 김치 없는 밥상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굳게 믿는지라 특별한 감동은 없습니다. 라헤마로 가는 길, 밖엔 비가 내립니다. 마른 땅에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흙냄새가 피어오르고, 숲의 향기는 두 배쯤 짙어집니다. 길 위에 떨어진 낙엽송의 이파리들이며 솔방울을 치우지 않아 발밑이 폭신폭신합니다. 그렇게 양탄자가 깔린 길을 걸어 세월의 진액이 고인 늪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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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늪인 줄 몰랐습니다. 풀밭인 줄 알았습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살짝 디뎌보고야 그게 물 위에 떠 있는 세월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뭇잎이 수십, 수백년씩 떨어지고 썩기를 되풀이해 두터운 층을 이뤘습니다. 두터운 자리는 그 두께가 9m에 이른답니다. 그 더께 위에 씨앗이 떨어져 풀이 나고 나무가 섰습니다. 봄여름으론 꽃이 피고, 겨울엔 눈이 덮입니다. 그 위에 깔아놓은 나뭇길이 끝없이 이어지며 지평선을 넘어갑니다. 고인 물엔 영양이 넘쳐 어둡게만 보입니다. 푸른 하늘이 드리운 검은 물을 헤치고 독일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홀로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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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래 살지 않았지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저것에 부딪혀 깨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습니다. 눈물도 나고 고름도 났습니다. 딱지가 앉을 만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어 다시 피가 흐르고 헌데가 잡혔습니다. 그렇게 다치고 낫기를 되풀이하면서 마음 가죽이 두터워지고 감각은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겉의 사정일 뿐, 그 각질 아래 고인 물은 여전히 고요해서 작은 돌 하나에도 파장이 끝없습니다.




2018/07/17 16:45 2018/07/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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