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_일본

겨울을 붙잡으러, 또는 봄을 당겨 맞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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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꼬드겨 여기까지 오게 만든 요물은 스리랑카의 4월, 그 뜨거운 폭염 아래서 감상한 일본영화 <비밀>이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숨진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을 빌려 어쩌고저쩌고한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지만, 화면만큼은 근사했습니다. 특히 첫 대목을 장식하는 설벽은 장관이었습니다. 대형버스 몇 곱이나 될 만큼 치쌓인 눈 담장이 신비로웠습니다. 당장 버킷리스트에 올려두고 13년을 묵혔다가 마침내 원풀이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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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야마

#1
일찌감치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달려왔는데,
출발선에는 더 부지런한 이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입장을 기다립니다. 넉 달 넘게 닫혔던 길이 처음 열리는 날이라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로프웨이와 케이블카, 고원버스를 갈아타고 고산지대를 가로지른 뒤에 나가노로 내려오는 게 오늘의 일정입니다.
표고 차가 2,400m라니, 백두산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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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버스가 출발하자 소란스럽던 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눈이 바빠서 입을 움직일 여유가 없습니다. 높게는 20m까지 쌓인 눈 사이로 길을 내고 그 길을 통해 버스가 오갑니다.
삼나무 숲이며, 온천이며, 폭포며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다지만 아직 지표가 드러나지 않은 터라 볼 거라곤 오로지 눈뿐인데도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백색의 스펙트럼이 몇 겹이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똑같이 희지만 엄연히 다른 흰빛의 잔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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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걷고, 만지고,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날 즈음, 버스가 무로도 역에 닿습니다.
2,450m 고지답게 바람이 매섭지만, 따끈한 햇살이 냉기를 절반쯤 덜어가 걸을 만합니다. 반지 모양으로 내놓은 500m 눈길을 걷습니다.
눈이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한 덕인지 설벽의 껍질은 매끄럽습니다. 눈 세상을 훑고 달려온 바람은 차고 투명합니다.
변덕은 또 얼마나 심한지 풍향계 바람개비는 맹렬하게 돌다가도 난데없이 멈춰서 숨을 고릅니다.

시라카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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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는 겨울과 작별했으니 산골마을 시라카와고로 봄을 맞으러 갑니다.
눈이 잦고 많은 동네의 집들은 뾰족하고 두텁습니다.
그래야 눈을 긁어내리기 쉽고 한겨울 한기를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두터운 띠 지붕은 30-40년에 한 번씩 온 동네 품앗이로 갈아 댔다니,
서로 도와 함께 사는 인정도 산골사람들의 겨울나기 방법이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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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을은 크지 않습니다.
도랑으로는 눈 녹은 물이 맹렬하게 흘러내리고, 팔뚝만 한 송어들이 물살을 거스릅니다.
햇살이 떨어지는 돌 틈으로 수선화들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논에는 이미 물이 흥건하고 그 잔잔한 수면이 띠 지붕을 되비춥니다.
커피 한 잔 사들고 의자 턱에 걸터앉아 오는 봄을 당겨 맞습니다.
겨우내 눈 치우느라 고생을 하고도 눈 세상으로 달려온 까닭이 퇴적된 시간을 보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확신에 혼란이 옵니다.
북극곰이나 북극여우처럼 눈이 못내 좋아서가 아니라 더디 오는 봄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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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9 16:26 2018/03/0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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