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JORDAN 01
무엇이든 깎고 다듬는 시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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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터키로 가는 길목쯤으로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요르단 패싱’이라고나 할까요?
대충 훑어보고 예루살렘으로 넘어갈 심산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암만까지, 쉬지 않고 밤길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내다본 요르단은 황량한 벌판, 인적이 끊긴 어두운 거리, 문을 닫아건 초라한 가게들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착각은 거기까지.이튿날, 투명한 햇살 아래로 요르단의 참 얼굴들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이웃 사이가 다정해 보였습니다. 큰길엔 자동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번듯한 가게부터 좌판까지, 온갖 장사치들이 나와 손님을잡았습니다.
눈 깊은 노인들과 호기심과 반항기가 뚝뚝 떨어지는 젊은이들이 나란히 거리를 누볐습니다. 세월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옛것과 새것이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습니다. 자동차와 낙타가 고속도로를 나눠 씁니다. 속도가 중요한 세상에 익숙한 눈에는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경유지 어쩌고 했던 건 섣부른 속단이었습니다.


글,
사진 나벽수(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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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첫 번째 목적지는 와디무집 계곡입니다.
물과 바람, 그리고 세월이 바위를 깎아 이룬 절벽 사이로맑은 시내가 흐릅니다. 수량은 대단찮은데 물살이 빨라 발을 딛기가 무섭게 바닥이 패입니다.
심심찮게 만나는 웅덩이는 수심이 제법 깊습니다. 밧줄 하나에 의지해 야트막한 폭포를 거슬러올라가는 구간도 있습니다.
출발한 지 채 10분도 안 돼서 물에 빠진 생쥐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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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길 와보고 싶었던 건 어느 해 송년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자리에 앉게 된 그 아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른들 틈에 끼어새초롬하게 앉은 폼이 예뻐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빠엄마를 따라 요르단에 오래 살았고, 얼마 뒤부터 독일에 있는 학교에 다닐거라고 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 아랍어를 편히 쓸 줄 알고 커서는 세계를 무대로 일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의 눈매, 입매가고왔습니다. 그리고 서너 달 뒤, 그 아이의 부음을 들었습니다.유학을 앞두고 떠난 가족여행에서 발을 헛디뎌 어이없게 세상을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단 한 번 본 누군가의 불행이그토록 사무치게 서글펐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걸었을 계곡을 오르며 묻고 답합니다. “뜻이 있었습니까? 있었겠지요? 생명의 주인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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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지불하는 대가에 따라 사해를 즐기는 법이 달라집니다. 값을 더 치르면 고급 호텔의 전용 해안에서 세련된 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여행자의 선택은 당연히 ‘공짜 해안’입니다. 백 미터쯤 흙길을 내려가 물가에 닿습니다.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짠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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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는 소금덩이가 굴러다닙니다. 주먹돌마다 소금기가 두텁게 달라붙었습니다.오랜 세월과 염분이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물 위에 누워 빙글빙글 흘러 다니며 생물시간에 배운 삼투압을 생각합니다. 내 욕심과사해의 소금물 가운데 어느 편의 농도가 더 짙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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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디럼
#3
와디럼은 붉은 모래벌판입니다.
바람이 오랜 시간을 두고 거대한 바위를 깎아 고운 모래를 만들었습니다.
픽업트럭을 개조해만든 관람차를 타고 벌판을 달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시간을 구경합니다. 자연이 만든 작품마다 인간들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버섯 모양으로 깎였으면 버섯바위, 구멍이 뚫렸으면마블아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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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 게 직업인 터라 숱한 이들과 만납니다. 가끔은 오래전에 마주했던 분을 다시 보기도 합니다.세월의 간격이 클수록 풍화의 흔적이 여실합니다. 시퍼렇던 서슬은 간데없고 온 얼굴에 따듯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매섭던 눈빛은 끝이 무뎌지고 질책을 쏟아내던 입으로 감사를 말합니다.뭐든지 깎고 다듬는 시간의 힘이라니! 낯선 땅에 섰는데도 도무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2018/01/09 16:54 2018/01/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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