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춘천에 갑니다
,
버리러 갑니다
춘천 강원도립화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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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살이를 끝내고 물 위로 떨어진 잎사귀들은 한동안 수면을 맴돌다 선배들 곁으로 가라앉습니다.


희한하게도 그 달라지지 않는 촌스러움이 자꾸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유일, 제일, 최고, 독점이란 수사를 붙이기엔 힘이 달리지만, 옆집 꽃밭처럼 은근히 웃음 짓게 하는 맛이 있습니다.

글, 사진 나벽수(여행가)




춘천에 갑니다. 닭갈비에 막국수 먹으러 가고, 겨울 공지천에 스케이트 타러 가고, 오래된 카페에 커피 마시러 가고, 호수를 보러 가고, 양구까지 뱃바람을 쐬러 가고, 손 꼭 잡고 춘천역 앞을 거닐러들 간다지만, 개중엔 이파리와 검불이 가라앉는 걸 보러 가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터무니없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요? 여기 있잖아요, 여기.

머릿속에 검불이 떠돌고 시든 잎사귀들이 어지럽게 나뒹굴면 곧장 춘천행입니다. 이만저만한 일로 자존심을 다쳤거나, 눈곱만큼도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하늘을 찌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흐르는 길을 바꾸고 생각의 물꼬를 새로 트기에 그만큼 만만한 데가 없으니까요. 고속도로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청평, 강촌을 지나 구봉산을 넘고 오래된 우체국과 세월교를 만나는 길도 있습니다. 속 달래기엔 옛길이 낫습니다. 강을 끼고 내려가는 사이에 더부룩한 속이 절반은 가라앉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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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원 한 곳에서만도 나고, 자라고, 활짝 피었다가, 이울고, 떠나는 이파리와 꽃잎들의 생활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자주 오가다 보니
 경유지가 차츰 줄어듭니다. 스케이트를 탈 줄 모르니 겨울 공지천이 탈락하고, 유람선 플라스틱 지붕이 싫어 뱃놀이가 떨어져나갑니다. 졸이고 졸인 끝에 남은 자리 하나가 바로 화목원, 정확하게는 강원도립화목원입니다. 애써 홍보하는 양반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확 달라졌다는데 뭐가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넓지 않은 땅에 고만고만한 건물, 대단하달 것없는 풀 나무들이 옹기종기 들어섰습니다. 기껏해야 대머리였던 토피어리(식물을 가꿔 여러 형상을 만든) 곰의 머리털이 무성해졌다는 것 정도가 눈에 띌 따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달라지지 않는 촌스러움이 자꾸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유일, 제일, 최고, 독점이란 수사를 붙이기엔 힘이 달리지만, 옆집 꽃밭처럼 은근히 웃음 짓게 하는 맛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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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디잔 열매들이 화려한 빛으로 새들을 유혹합니다. 한입에 먹혀 자손들을 멀리멀리 퍼트리려는 간절함이 빨갛게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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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서늘해지면서 잎이 성겨지고 가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뒤에 다시 오면 앙상한 줄기들만 남을 겁니다. 하늘매발톱이랑 고려엉겅퀴가 다 져서 흔적만 남은 지피식물원과 약용식물원, 이미 전성기를 넘긴 연꽃붙이들이 자라는 수생식물원을 지나쳐 밤비식물원으로 들어갑니다. 열대식물, 거대한 선인장 따위가 몰려 있는 이 집은 칼칼한 가을에도 따듯해서 좋습니다. 등치 큰 선인장들이 탐나지만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을 성싶어 침만 삼키고 맙니다. 아가베아테누아타 어쩌구 하는 긴 이름을 서너 개 읽다가 집어치웁니다. 이력서를 꼼꼼히 챙기는 노릇은 전문가와 학생들한테 기꺼이 양도하고 건성건성 넘어갑니다. 자연히 속도가 빨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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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습지원, 싣고 온 마음의 쓰레기들을 내버릴 명당에 자리를 잡습니다. 흔해빠진 팔각정에 반달다리 하나, 조그만 연못, 바위 몇 덩이가 전부지만, 자리가 외져 조용합니다. 다리 난간에 기대 시간을 보냅니다. 하늘을 담아 푸른 물 위로 낙엽들이 떠다닙니다. 물이 맑진 않지만 잔잔하고 얕아서 속이 다 들여다보입니다. 먼저 떨어진 선배 낙엽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나고, 자라고, 활짝 피었다가, 이울고, 떠나는 이파리의 생활사가 한눈에 보입니다.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빗대면 이파리의 연한보다 더 짧을 삶의 길이를 헤아립니다. 스스로를 내세우고 닥치는 대로 움켜쥐는 데 그 ‘눈 깜짝할 사이’를 쓰지 않기로 합니다.

쓰레기를 버렸으니 돌아가야겠습니다. 짐이 빠진 자리는 닭갈비든, 막국수든, 감자전이든, 손두부든 맛난 걸로 채우고요.


강원도립화목원 가는 길
춘천역과 남춘천역, 명동을 비롯해 춘천시 어디서나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버스 노선도 10개가 넘는다. 승용차를 타고 자동차전용도로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춘천 톨게이트에서 인제 양구 방향으로 직진한다. 국도를 이용해 강촌검문소와 의암사거리를 지나는 길도 좋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어른의 입장료는 1,000원이다.







2017/10/11 10:58 2017/10/1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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