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펜화로 그린 세브란스 모습,
궁금하시죠?


못가에 앉자마자 그날 일이 떠오른 건 아마 기시감이들 만큼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얼 반드시 봐야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그에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던 그날과 오늘의 경험들이 말입니다.

글, 사진 나벽수(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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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찰산을 병풍삼아 야트막하게 들어선 꼴이 얌전하고 다정합니다.
매화와 목련, 석탑 따위가 어울려 저절로 시와 그림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날이 흐립니다. 어여쁜 기상캐스터가 뉴스에 나와서 비가 올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차를 몰고 나섭니다. 진도에 갈 참입니다. 날이 궂다니 잡지에, 텔레비전에, 인터넷에 나오는 멋진 풍경들을 보긴 글렀습니다. 애면글 면하지 않기로 합니다. 대신, 당첨을 바라고 복권을 사 든 기분을 장착합니다. 진도라는 보물 상자에서 소문난 이것 저것들을 다 덜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도착이 늦었습니다. 미리 잡아둔 숙소부터 찾습니다. 삼별초 공원에 딸린 한옥인데 근사한 울림과 달리 실상은 얼치깁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화장실 문이 워낙 뻑뻑해 급한 용무가 생길 때마다 손잡이를 부여잡고 한 대씩 걷어차줘야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전기장판은 금세 뜨거워지지만 구들장처럼 뭉근한 맛이 없어 쉬 차가워집니다. 웃풍이 여간 센 게 아닙니다. 생뚱맞게 방 한쪽을 차지한 전기히터의 쓸모를 알 듯합니다.
자꾸 툴툴거리는 속내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눕습니다. 불을 끄자 사방이 암흑천지입니다. 그러곤 이내 잔치가 시작됩니다. 진도의 숲이 내는 온갖 소리의 축제입니다. 저녁부터 부쩍 세진 바람이 대나무 숲을 훑고 지나가며 솨솨 소리를 냅니다. 몽돌해안의 파도소리를 닮았습니다. 사이사이 톡톡 작은 북소리가 납니다. 그예 비가 오는 모양입니다. 처마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덟 번 날 때마다 산에서새가 웁니다. 쟤는 잠도 없나 봅니다. 방값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 시원한 소리 값이 포함되어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뻑뻑한 문짝 따위를 타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습니다. 여정 전체를 통틀어 여기 한 군데만 봐도 좋다고 점찍어둔 행선지입니다. 뭐하는 곳이냐면, 옛 화가의 화실입니다. 임금님과 마주 앉아 그림을 그렸고 추사 선생이 “압록강 동쪽에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니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던 걸까요? 어두운 귀에도 이름이 익은 걸 보면 대가는정녕 대가인 모양입니다. 아, 함자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소치 허련 선생입니다. 이곳 산방은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자그마한 집이자, 작업실이고요. 주인의 살림과 그림을 보고 싶어 서두르려는데 입구의 아름드리 동백 세 그루가 발목을 잡습니다. 저렇게 큰 동백나무를 본 적이 있는지 더듬어봅니다. 없는 것 같습니다. 마나 공들여 가꿨던지 그 큰 나무에 촘촘히 꽃이 달렸습니다. 저게 시들어 툭툭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간신히 떨치고 못가에 서서 건너편 산방을 내다봅니다. 첨찰산을 병풍 삼아 야트막하게 들어선 꼴이 얌전하고 다정합니다. 주인은 저 마루에 앉아 세월을 읊고 그림을 그렸겠지요? 기념관에 줄지어 선 그림들은 그런 침잠의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명불허전. 그림은 근사했습니다. 명작은 백치도 알아보는
법인지, 문외한의 눈에도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굵은 붓이 담박하게 지나간 자리에 진하고 가는 선으로 뼈대를 넣었습니다. 글씨도 빼어나고 글도 아름답습니다(한시를 풀어 안 건 아니고 우리말 풀이를 꼼꼼히 읽어 이해했습니다). 초상 한 번 본 적이 없는데도 화가의 진지한 얼굴을 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구경. 이번엔 온 길을 되짚어 비공식적인 유람에 들어갑니다.
기념관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매화나무 가지를 잡아 흔듭니다. 떨어진 꽃잎이 날려 꽃비를 만듭니다. 호수엔 나무 그림자가 길게 걸리고 붉은 잉어가 그 가지 사이를 노닙니다. 먹이라도 주는 줄 알았는지 더 많은 녀석들이 몰려듭니다. 물비늘이 일어나고 나무 그림자가 심하게 요동칩니다. 산방을 둘러싼 돌담은 정연하지만 자유롭습니다. 석공의 재주가 화가의 솜씨에 버금갑니다. 손으로 더듬으며 산방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무심코 들여다본 부엌에는 살강이 걸렸고 그 위에 주둥이 깨진 술병 나부랭이들이 줄지어 섰습니다. 이름 모를 일꾼의 배열이 큐레이터의 배치를 찜 쪄 먹을 정도입니다.

페와호에 갔던 날도 날씨가 꼭 이랬습니다. 인디아 바라나
시에서 네팔의 카트만두까지 1박 2일을 꼬박 달린 뒤에 다시 버스를 잡아타고 포카라까지 내려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에 피시테일 뾰족한 봉우리가 비치는 꼴을 꼭 보고 싶어 찾아간 길이었는데, 몸살이 날 만큼 고생을 하고도 낙(樂)을 얻지 못했습니다. 짙은 구름이 내려앉아 설산은커녕 뒷동산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 꽝이었을까요? 천만에요. 무언가를 꼭 보겠다는 욕심이 사라지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히말라야 산군에 버금가게 아름다운 골목이 보이고, 토담집 안마당에 늘어놓은 토기 항아리가 보이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하나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못가에 앉자마자 그날 일이 떠오른 건 아마 기시감이 들 만큼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얼 반드시 봐야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그에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던 그날과 오늘의 경험들이 말입니다.

운림산방 가는 길
정확한 주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번지”다. 진도의 길이 워낙 단순해서 찾기가 어렵지 않다. 진도읍에서 의신 쪽으로 직진하다 왕온의 묘를 끼고 좌회전하면 금방 만날 수 있다. 진도터미널에서 평일 네 차례 버스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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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마당엔 동백과 매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내 꽃비가 내립니다.
4, 5 붉은 잉어의 놀이터엔 꽃비가 멎어 있고, 화가는 매화와 같이 살아서 좋다는 시를 적어두었습니다.
6, 7 마음과 눈에 향기를 가득 담았지만 차마 그곳, 팽목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산방 문앞에 찾아온 봄이 아직 여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7/04/14 17:02 2017/04/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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