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환자 진지한 치료중단 의사' 다소 추상적 기준 제시
연세의료원 "무엇을 근거로 진지한 의사 판단할지 문제"

                                                    황운하 기자 newuna@docdocdoc.co.kr
                                                    등록 : 2009-02-10 13:21

서울고등법원 민사9부(이인복 부장판사)가 10일 오전 식물인간상태에 빠진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2심 판결의 요지는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밝힌 환자의 ‘사전의사결정서’가 없더라도 환자의 ‘진지한’ 의사가 확인될 경우 의료진은 연명치료 중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동안 원고측(환자 김 모씨)은 환자의 추정적 의사를 인정해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피고측(연세의료원)은 사전의사결정서가 없는 추정적 의사만으론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고 맞섰다.

고법의 이번 2심 판결은 원고측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사실상 환자의 추정적 의사결정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고법 민사9부 이인복 부장판사는 이날 판결에서 “사전의료결정서가 법리화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자 하는 환자의 판단이 진지하다면 연명치료 중단 의사로 볼 수 있다”며 “사전의사결정서가 없더라도 본인의 의사결정 판단이 불가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렇다면 이번 판결이 세간의 기대처럼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그동안 의료계와 환자측은 고법의 판결과 무관하게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해 주길 기대했다.

연세의료원의 항소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김 모씨의 호흡기를 떼라는 1심 판결은 김 씨에게만 국한된 판결일 뿐 김 씨 이외에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어서 의료현장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판결에서 고법 재판부는 연세의료원이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 소송’의 항소심을 기각, 환자 김 모씨의 호흡기를 떼라고 판결하며 연명치료 중단시 고려해야 할 4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는 비가역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주치의 단독으로 판단하지 말 것. 즉 제3의 의료기관을 통해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따지라는 것이다.

둘째,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 중단 의사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셋째, 연명치료중단 시행은 남용을 막기 위해 반드시 의사가 할 것, 그리고 넷째로 이같은 조건이 현재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치료 중단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4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병원은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는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환자의 진지한 의사'…다소 추상적 판단 기준 제시

병원 측 "존엄사에 대한 객관적 기준 마련은 미흡" 평가

원고측과 피고측 모두 이번 2심 판결이 ‘환자 김 모씨의 인공호흡기만 떼라’고 판결한 1심보다 보편적인 기준을 마련했다는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재판부는 연명치료중단 결정의 열쇠가 될 환자의 의사결정 판단에 있어 ‘진지한 의사’일 경우라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해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특히 피고인 병원 측은 이번 판결이 원고측인 김 모씨의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의 소송대리인인 박형욱 변호사는 “재판부가 이번 판결이 사전의료결정서와 존엄사 법제화 과정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언급한 것은 고무적”이라며 “4가지 기준은 1심에서 나아간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판결문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재판부가 언급한 환자의 진지한 의사결정은 약간은 추상적이다. 무엇을 근거로 진지한 의사를 판달 할 것인지가 문제로 남아있다”며 “오늘 판결 내용만을 보면 이번 소송 건에 대해서만 연명치료의 타당성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반면 원고측은 환자의 추정적 의사도 인정한 것이라고 반기며 ‘진지하고 합리적인 의사’는 상식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객관화된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고측 변호인인 신현호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1심의 판결처럼 환자가 치료 결정권을 가진 것을 인정한 것”이라며 “이런 요건을 제시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몇 건 없다.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이 고등법원이 제시한 요건에 맞지 않을 경우 의사들에게 치료중단을 요청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이어 “환자의 진지한 의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일 것”이라며 “사회적 상규상 상식선에서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살펴볼 때 법원의 이번 판결이 1976년 미국의 '카렌 퀸란 판결'처럼 존엄사 제도의 활성화와 입법화를 이끄는 기념비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질지는 여전히 확신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항소에서 패소한 연세의료원측은 판결문을 받은 후 다음주 중 병원윤리위원회를 개최해 대법원 상고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연세의료원 홍보실 금기창 실장은 “아직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다음주 중 병원윤리위원회를 열고 주치의를 통해 환자 상태를 파악한 후 상고 여부를 최종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원고측은 연세의료원이 대법원에 상고할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고측 변호인인 신현호 변호사는 “연세의료원이 당연히 상고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환자 가족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며 “현재 환자 김 모씨는 체온이 35도까지 떨어져 있고 혈압도 낮은데다 피부색도 점점 어두워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상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존엄사 기념비적 판결 ‘카렌 퀸란’ ]
미국의 카렌 퀸란 판결은 인공호흡기 제거에 대한 기념비적 판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75년 4월 15일 뉴저지주에 거주했던 당시 21세의 여성 카렌 퀸란은 친구의 생일날 진토닉에 마약을 섞어 마신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지속적 식물상태(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가 돼 인공호흡기에 생명을 유지한다.

얼마 후 부모들은 카렌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기계에 의존해서 식물상태로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두 차례에 걸쳐 말한 딸의 뜻에 따라 병원측에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다. 그러나 주치의는 인공호흡기 제거를 거절했다.

이에 카렌의 아버지인 조셉 퀸란은 뉴저지주 검인법원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1심 법원은 카렌의 연명치료 중단 의사가 서면으로 기록된 적이 없고 가족의 증언도 그녀 본인의 죽음과 관계되는 것이라며 기각했다. 이후 뉴저지 대법원은 중요한 선례가 될지 모르는 이 사건을 항소 없이 직접 심리키로 결정했다. 1976년 1월 뉴저지주 대법원은 두 달 동안의 심리 끝에 퀸란 가족의 손을 들어준다. 판결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원고를 위하여 적극적 구제조치를 선고한다. 담당 의사가 카렌이 혼수상태에서 회복하여 의식을 되찾을 합리적 가능성이 없으며 카렌에게 부착되어 있는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카렌의 후견인과 가족이 이에 동의하는 경우, 그들은 카렌이 입원해 있는 병원의 ‘윤리위원회’ 혹은 유사한 기구에 자문을 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협의체에서 카렌이 혼수상태에서 회복하여 의식을 되찾을 합리적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으며 그 행위로 인하여 후견인, 의사, 병원 등 관련자들 어느 누구도 민사상,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호흡기 등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카렌 퀸란 판결 이후 미국 병원에서는 병원윤리위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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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08:52 2009/05/1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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