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문득 든 생각을 적어 본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에는 초첨 거리를 28 mm부터 85 mm까지 조절할 수 있는 줌렌즈가 달려 있다. 50 mm의 표준 시점으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삼덩굴1의 길쪼롬하게 올라온 꽃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노랗게 익어(?) 가고 있는 봉오리, 주변을 날아 다니는 나비가 보인다. 뒤 배경으로는 화단의 바위가 보인다. 잠시 후, 이내 나의 손은 85 mm 망원 시점으로 봉오리를 당기고 있다. 이제는 꽃 봉오리와 안쪽의 구조물들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그 장면을 바라 보고 있으니 가을 바람이 불어와 꽃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꽃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를 잡은 내 두 팔과 눈이 쉴 새가 없다. 배경은 안중에도 없고 보일 듯 안 보일 듯 하는 꽃을 따라 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지친 나는 벌써 렌즈의 다이얼을 돌려 35 mm의 광각 시점으로 가지고 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한삼덩굴 군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내가 보던 꽃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군락 여기 저기 꽃 봉오리들이 수 없이 올라와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뒷편 음대 앞 주차장에 서 있는 외제차의 번호판도 들어오고, 누군가 화단에 버리고 간 아이스크림 껍질도 보인다. 아까 보이던 바위의 다양한 색깔도 보인다. 어느새 내가 보고 있던 꽃을 놓쳤다. 다시금 다이알을 돌리며 아까 보던 꽃을 찾는다. 저기 보인다.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바람도 살랑거린다. 셔터를 누른다. 드디어 그 꽃이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로 들어 왔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한다2. 그 사랑은 처음엔 보통의 시선으로 시작되지만, 상대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눈은 빠른 속도로 줌-인 한다. 그 사람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물론, 주변의 상황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행복해 하는 것도 잠시, 시련은 찾아 오게 마련이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의 오감 중에 가장 빨리 피로를 느끼는 감각이 바로 시각이라고, 어지럽고 지쳐 이번에는 줌-아웃! 먼발치에서 보면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랑이 눈에 들어 올 수도 있고, 사랑이 아닌 사람의 배경을 알게 되는 것도 이 때일 것이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다시 줌-이번엔 조금만이다. 그리고 조용히 담백하게 셔터를 누른다. “찰칵…”3. 드디어 그 사랑이 뇌의 한 구역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사진을 찍을 때도 사랑을 할 때도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그 꽃과 나와의 거리는 조금도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각주

1.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을철 꽃가루 알레르기의 원인 식물로 8월 말에서 9월초에 개화한다.

2.     그렇다면 사람의 학명은 Homo amor ?

3.     듣는 사람에 따라 오빠 사랑해”, “XX씨 제 사랑을 받아 주세요등 여러 가지로 들릴 수 있음.

2013/08/30 12:37 2013/08/3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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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류재숙 2014/11/17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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