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행복은 쓰레기통에도 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까뮈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이 행복론에 대해서 엮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뒤쫓아 마당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어미 개가 강아지한테 물었습니다. “너 왜 그렇게 꼬리를 쫓고 있느냐?” 강아지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실 나는요, 세상의 그 어떤 개도 풀지 못한 우주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했어요. 그것은 우리 개한테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더욱이 그 행복은 내 꼬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꼬리를 좇아 돌고 있는 거예요. 내가 꼬리를 잡는다면 나는 틀림없이 행복해질 테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어미 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 나름대로 우주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마침내 몇 가지 견해를 갖게 되었단다. 나 역시 개한테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며 그것이 내 꼬리에 있다고 판단했었단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나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꼬리는 자연히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알겠냐? 이 개새끼야-.”

 

여러분, 아시잖아요. 행복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쟁취하는 것도 아니며, 싸워서나 투쟁해서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 억지로 얻어지는 행복은 그대로 무너진다는 것 말입니다. 행복은 의의 길에서, 선한 길에서, 하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서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요 거저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부수입입니다. 행복은 목적으로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기초적이며 유치한 이야기 입니다마는,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떤 때는 돈이 있으면 죽을 사람도 살릴 것 같습니다. 또는 돈이 없어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돈을 준다고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돈을 받았다고 해서 행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돈으로 거래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여러분은 받는 것이 행복합니까? 주는 것이 행복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은 베푸는 데 있는 것입니다. 받는 순간 그것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너무 많이 받으면 뇌물이요, 적게 받으면 욕먹는 것 같습니다. 그런고로 제일 좋은 것은 베푸는 것입니다.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

 

그런가하면 행복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불어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쁠 수 있습니다. 남을 울리고 내가 기쁠 수 없습니다. 남을 아프게 하고 내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행복은 더불어 얻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흔히들, 여자 팔자는 남자에게 달렸다느니, 남자의 운명은 여자에게 달렸다느니 합니다. 심지어는 내 성격이 나빠진 것도 저 사람 때문이랍니다. 이것 또한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유치한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맙시다. 여러분, 내 행복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의존 될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행복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는 불행의 원인이 욕심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욕심이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없다, 그래서 욕심이 없어야 하겠다, 마음을 비워야 하겠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이 그래요. 음식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식욕이 문제인거지. 식욕이 있어야 음식을 즐기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욕심자체를 정죄하는 데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여우 한 마리가 너무도 배가 고파서 어느 포도원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잘 익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여우는 포도를 따려고 있는 힘을 다해 펄쩍 뛰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높이 뛰어도 포도를 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온 종일 뛰고 또 뛰다가 결국은 포도 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여우는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저 포도는 시다, 시어서 먹을 수 없는 포도다.’

 

, 어떻습니까? 이 여우한테는 탈출구가 두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포도원을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고 싶은 마음을 싹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애고, 먹고 싶다는 마음도 없애는 것입니다. 염세주의입니다. 욕망을 싹 없애야 행복해 질 수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죽은 것이지요. 죽어버린 자의 모습이지요. 무릇 욕망이 지나쳐도 불행이지만 욕망이 없어도 불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욕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 또한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을 영위하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느 철학자가 길을 걸아 가는데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가 다가와 구걸을 합니다. 사실 그도 수중에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 날은 큰맘 먹고 거지에게 5불을 적선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은 거지는 제법 좋은 식당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는 좋은 음식을 시키고 포도주까지 곁들여서 식사를 합니다. 돈을 준 철학자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거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이 보시오 그 돈이면 꽤 오랫동안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한꺼번에 없애 버리는 거요?” 거지는 대답합니다. “이봐요,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왜 참견이요? 나는 이 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즐기고 싶은거요. 내일은 또 내일이지요.” 그러더랍니다. 물론 이 말은 계획성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한 순간 한 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생각하자는 말씀입니다. 식탁을 대할 때마다 그 시간을 항상 축제의 시간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이런 자세로 한 순간 한 순간, 한 시간 한 시간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식탁을 대하나, 잠자리를 대하나, 친구를 대하나, 아내를 대하나, 남편을 대하나 그저 감사하고 기쁘고 항상 잔치하는 마음, 마음이 즐거운 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마음이 즐겁고, 마음이 즐겁고 보니 얼굴에 윤택이 있고 빛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 단순한 마음, 항상 축제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충만한 기쁨에 계십니다.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지금 승리의 기쁨으로 충만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에게 물려주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내 마음에 그 깊은 은혜의 잔치가 있을 때 사랑을 베풀고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러한 길에 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여서 매 순간 순간 즐겁고 기쁜 마음이 되어서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16/03/07 08:49 2016/03/07 08:49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 신약성경 빌립보서 중에서 한 구절만 외워 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빌립보서 4:13절을 외우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특별히 이 말씀은 김형중 병원장님께서 2016년 우리 병원이 이 말씀을 중심으로 마음을 합했으면 좋겠다 하시며 정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왜 이 구절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그 대답이 한결 같습니다. 만병통치약과 같은 느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적극주의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 같아서 좋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은 적극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소위 불가능이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사건을 만나든, 어떤 환경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나는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능력으로,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바울 사도의 소중한 간증입니다. 내 힘으로가 아닙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붙드신, 나를 사용하신, 나를 고용하신 그분께서, 나의 힘이 되신 그분께서 나를 통해 하셨고, 또 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늘이 하시는 것이니까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래, 오늘 말씀 11, 12절에 나는 배웠노라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삶에서 배웠다’ ‘깨달았다’ ‘알게 됐다.’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헬라어 원어의 시제로 따지면 하나는 과거로 되어 있고, 하나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나는 과거에도 배웠고, 지금까지도 배우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 그것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간증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나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통해 하늘의 역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나는 내 몸의 힘을 빼는 것, 내 몸의 힘을 빼는 것을 배우고 있노라하는 것입니다. 사건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훈련입니다. 신앙적 훈련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결단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하늘의 역사에 나를 동참시켜 주셨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맡겨주셨습니다. 일만 맡겨주신 것이 아닙니다. 맡겨주신 하늘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사람들을 모아 주십니다. 힘을 모으게 하십니다. 인도해 주십니다. 간섭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내 입으로 간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11)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하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두 가지란, ‘미래에 대한 꿈,’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미래와 이 현실을 자족하는 것,’ 나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응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 말입니다. 신앙은, 믿음은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까. 그리고 그 바라는 것들을 지금 실천하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 자족하는 것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인격이며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온 땅에 복음이 전해져야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백한 꿈과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 삶에 대해서, 이 거룩한 사역을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자족하면서 미래의 꿈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꿈은 미래요, 자족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말하는 자족지금은 내가 힘들어도 내일을 위해서 꾹 참아야지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내일 무지하게 행복하게 해 줄 터이니 오늘은 꾹 참고 견뎌라이것처럼 허무맹랑한 약속이 없습니다. 그런 약속은 하지도 말 것이며 듣지도 마세요. 내일 행복을 당신이 어떻게 장담합니까? 설사, 내일 더 행복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오늘대로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자, 오늘은 참자. 먼 훗날의 즐거움과 누릴 영광을 위해서 오늘은 참자.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자.’ 합니다마는 이거 아닙니다. 오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감사하십시오. 지금 행복하십시오. 맡겨주신 이 일이, 이대로가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궁핍에 처해도, 잘 되어도, 잘 안 되어도, 이대로 감사하는 것, 현재를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고백하고,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의 인생은 참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부자였을 때도, 가난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고난당할 때도, 풍요의 자리에 들어설 때도 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 비결을 로마서 838-3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완벽하게 사랑하시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부등호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것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도 하나님은 절대 부등호로 크신 분이시기에 그 분 안에 있으면 이런 놀라운 은혜를 간증하게 된다는 겁니다.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사역에 불러주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사람도 붙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맡겨주신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 몸의 힘을 빼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며 예배의 시간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예배와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강남세브란스병원을 통해 마음껏 역사하시기를, 내 몸에 힘을 빼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을 감사합시다. 만족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오늘 말입니다. 지금 말입니다. 이 자족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따라 해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제는 함께 외워 보십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제는 함께 외쳐보십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2016/02/19 14:24 2016/02/19 14:24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열 살 난 아이가 얼마나 많은 단어를 구사할 수 있느냐를 연구해 보았더니 약 6천 단어 이더랍니다. 그런데 그 6천 단어 중에 부모가 가장 기뻐하는 단어는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약 25천 단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25천 단어 중에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말, 그것도 감사합니다.”하는 말이더랍니다. 나도 기쁘고 너도 기쁜, 우리를 기쁘게 하는 한 마디,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랍니다.

 

2015년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년 말이 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연예대상’ ‘가요대상이런 제목의 프로그램들을 하잖아요. 저는 늘 버릇처럼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은혜 간증 대상이런 거 좀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한 해를 회상하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참 많다, 지금 생각하니까 다 은혜다, 가족의 사랑이 있었고, 동료들의 지지가 있었다, 직장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이 있어서 감사하고, 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받은 은혜가 참 많다.’ 하는,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은혜 간증 대상식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참 잘했노라, 참 수고했노라 칭찬하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고받는 덕담과 선물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나를 위한 덕담, 나를 위한 선물 하나 준비하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수고 많았다. 그리고 참 감사하다고요.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감사를 받는 마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로 시작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감사하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거지, 행복하지 못해서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감사는 깨달음으로 시작돼요. 여러분, 감사는 깨달음과 연결됩니다.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해버리면 당연히 감사가 없지 않겠어요? 부모가 자식 낳아서 키우는 것을 두고, 그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해 버리면 자식으로서 감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니냐고 당연시해 버리면, 거기에 무슨 고마움과 감사가 있겠습니까? 뭐든지 당연하게 여겨버리는 여기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시편 49:20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했습니다. 좀 거친 표현으로 들립니다마는 그래요,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모르면, 만족함도 감사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감사에는 물질적 차원이 있습니다. 주고받으면서 감사하는 건데요, 이거 오래가지 못한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있을 때는 감사하지만 없을 때는 감사하지 못하는, 이런 상대적 감사는 진실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철학적 감사도 있습니다. 헬라의 어느 철학자가 비가 많이 쏟아지는데 일부러 우산을 쓰지 않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팔을 들면서 ! 신이여 감사하나이다.”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감사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콧구멍이 밑으로 뚫렸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더랍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하나 부러진 것이 둘 부러진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다리가 둘 부러졌더라도 목 부러진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생각 속에서 철학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감사는 은총적 감사입니다. 은혜를 생각합니다. 나의 나 됨에 대한 감사입니다. 존재에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여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십시오. 남자로 태어났습니까? 그대로 감사하십시오. 남의 아내가 되었으면 아내가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남편이 되었으면 남편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자식이 되었으면 자식 된 그 존재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은총으로 받고 은혜 안에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빌립보서에만 기쁨이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말씀의 3, 4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을 보십시오. 무엇을 생각하든지 생각만 하면 감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생각해도, 가정을 생각해도, 자녀를 생각해도, 직장을 생각해도, 모든 일에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다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이것은 이래서 불평이요, 저것은 저래서 원망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은혜 안에 있는 자,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관계 속에서, 은총 속에 있다고 고백하는 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생각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이것은 구체적인 고백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이것을 생각해도 저것을 생각해도 다 은혜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고백하며 간증하는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여러분,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습니까?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십시오. 행복한 인생을 만들고 싶습니까? 감사하다고 말하십시오. 감사하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쁨이 올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받는 그 시간이 행복의 극치입니다.

모름지기 감사가 습관이 되어야 하고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해할 때 찬송하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기도하는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감사함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2015, 얼마 남지 않은 메모리 카드의 마지막 부분에 감사의 사진이 많이 담겨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 내 메모리 카드를 정리할 때, 삭제하고 싶은 장면 남겨 놓고 싶은 장면들을 가릴 때, 감사의 장면들이 많이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간증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얻으시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015/12/14 10:09 2015/12/14 10:09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4, 12)


솔개는 약 70년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개가 70년을 살려면 40년 쯤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결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40년쯤이 되면 발톱이 노화되어서 사냥감을 낚아채지를 못하게 되고 움켜잡지도 못하게 된답니다. 부리는 길게 자라 구부러져서 가슴을 찌를 정도가 되어서 먹이를 물수도 먹지도 못하게 되고, 깃털도 두껍게 자라서 무거워 자유롭게 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쯤 솔개는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된답니다. 그렇게 그대로 죽음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약 반년의 시간동안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의 과정을 치러내어 솔개로서의 새로운 시간을 살든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솔개는 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부리로 바위를 쪼아댄답니다. 부리가 부러지고, 깨지고, 빠지고, 피범벅이 됩니다. 그리고는 새 부리가 돋아나는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답니다. 그렇게 해서 부리가 나온 다음에는 그 부리로 노화된 발톱을 하나하나 다 뽑아버린답니다. 자기 발톱을 자기가 뽑아내는 것입니다. 굵게 자란 깃털도 다 뽑아버린답니다. 그렇게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다시 30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낡은 생명이 부정되고 버려져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가 발전하고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기를 비워야하고 부정해야 하고 부인해야 하는 것은 사실, 이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다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욕심을 버려야할 줄 알면서도 못 버려요.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하면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지 말자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옛날에 매이고 있어요.

  그래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시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라조라고 하는데 훈련’ ‘단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의 본래 뜻은 뭔가 넘어뜨리려고 하는 심판적 의도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더 높은 곳을 향한 새로운 시작, 더 성숙하고 더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더 단단하게’, ‘더 확고하게만드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가시는, 다음 단계, 더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기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 그것을 시험’, ‘훈련’, ‘연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훈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 ‘훈련의 최종 목표,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야보고서 1:12절입니다. “이 시험을, 이 시련을 잘 견디어 낸 자들에게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이 시험만 잘 통과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시험은, 이 연단은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2015/10/28 13:36 2015/10/28 13:36

1964년 미국에서 출간된 <The Martyred (순교자)>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람 Richard Kim. 김은국 이라는 사람이 쓴 작품입니다. 김은국은 이 소설로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이 되면서 많은 화제를 낳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내용은 이렇습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직전에 평양에 있는 목사님 열네 명이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열두 명은 처형을 당하고 두 명은 살아남았습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이 다시 평양에 들어 간 다음에 그 처형당한 열두 명은 순교자라는 칭송을 얻고, 사람들이 그들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교회마다 이 열두 분의 순교자를 높이 추앙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의 믿음을 따라 바른 길을 가야 하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두 명은 계속 추궁을 당하고 비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으로 순교했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너희들은 배신자다, 배교자다!” 하지만 두 목사님은 아무런 대꾸가 없습니다. 그 당시가 어떠했는지 설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열두 명을 처형한 인민군 정 소좌라는 사람이 국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정 소좌에 의해 비로소 그 때의 상황과, 진상이 시원하게 밝혀집니다. 공산당은 저들을 잡아 놓고 협박을 하고 위협을 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답니다. 그 때에 열두 명의 목사는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면서, 비굴하게 서로 음해했다고 합니다. 그래 너무도 비겁해서 그들을 죽여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 중 한 사람은 고문에 못 견뎌서 미쳐 버렸습니다. 미쳐 버린 사람을 죽일 것까지야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단 한 사람, 신 목사라는 사람만은 유일하게 끝까지 기독교 복음으로 당당하게 맞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자기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신 목사의 신앙과 죽음을 이겨내는 용기에 감복되어 그 사람만을 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쳐버린 사람을 포함해서 두 명만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미쳤던 사람은 자기정신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하나도 모르고, 오로지 신 목사님만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죽은 열두 사람은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높이높이 존경을 받지만, 살아남은 이 두 사람은 배신자요 배교자라고 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 목사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죄인의 처지로 교회에 사표를 내고 다른 교회로, 또 다른 교회로 옮겨 다니면서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그는 힘 있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왜일까? 배신자의 설교가 왜 그렇게 힘이 있을까? 왜일까?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비밀을 알고 계신다. 이것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요 그가 비밀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 소설은 이렇게 끝납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 새번역 성서는 아주 간결하고 단호하게 표현합니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알려져서 환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러분, ‘숨은 것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숨겨지는 것숨기는 것입니다.

 

숨겨지는일이 있습니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뜻도 악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숨기는일은 고의적인 것입니다. 물론, 잠깐 동안 임시로 숨기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애기 낳는 일에 대해서 다 설명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예 숨겨 버리는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증거인멸이요, 완전범죄를 하고자 하는 의도적 행위입니다. 완전히, 완벽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요, 이것이 문제요,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숨김으로써 무마될 수 있다고 하는 것, 숨김으로써 내가 이익을 얻고, 숨김으로서 내가 행복하고, 숨김으로 내가 권세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숨겨지는 일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일 뿐이며, 잠시 뿐이다.’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은 숨길 수 없고, 하나님께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장차 모든 것이 다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모 잡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화려하게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첫 아이를 낳을 때, 특실에서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간호사들과 의사들에게 팁을 주는 등 굉장한 잔치라도 하는 것처럼 유난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 아이였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비밀이 숨겨지리라 생각했습니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이거 하나 분명하게 집고 넘어갑시다. 나 스스로가 드러내면 회개요, 다른 사람이 드러내면 비판입니다. 나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 참회요, 하나님께서 내 잘못을 비판하시면 심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그 성적표 숨기느라 얼마나 애태웠습니까. 도장 몰래 찍어갔다가 들켜서 회초리도 맞았고요. 그런데 성적이 좀 괜찮다 싶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싶어서 성적표 휘날리며뛰어옵니다. 좋은 성적이면 누가 알아 줬으면 좋겠다.’ 싶고요, 부끄러운 일이면 어떻게든 단 하루라도 더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고 사는 것, 하나님 앞에 다 노출된 모습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이 용기입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환하게 드러날 것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아름다운 일을 심어 놓고, 응당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니, 조만간에 열매가 맺힐 것을 은근히, 흐뭇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 여기에 쾌감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전부를 아신다, 이 보다 더 당당하고 용기를 주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구차한 변명 하지 맙시다. 알아 달라고도 하지 맙시다. 일체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아시니까요.

  그런고로 아름답고 은혜로운 일들을 심어 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추수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위로와 능력과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드러내게 하시는 그 날의 위로와 기쁨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신앙이 내 삶으로 증명되는 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015/08/19 09:30 2015/08/19 09:3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래전, 어느 신문에 실렸던 칼럼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어렸을 때 나이키 운동화가 미치도록 신고 싶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고 싶었는지 사람을 볼 때 딱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답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사람, 안 신은 사람. 그래서 어머니께 졸랐는데,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 그 성적 가지고 어떻게 나이키를 사달라고 하냐?” 그러시더랍니다. “그러면 공부 열심히 해서 20등 할게요. 사 주세요.” 그랬더니 어머니 말씀이 네가 20등 한다는 거 보니까... 그러면 40등은 하겠구나.” 그러셨대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20등은 못하겠더래요. 그래서 가출을 해 버렸답니다. 어느 중국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손님들에게 자장면도 나르고 그렇게 지냈답니다, 나이키 운동화 살려고. 그래 어머니가 할 수 없어 나이키 운동화를 사다 놓고 친구들을 통해 나이키 운동화 사 놨으니까 돌아오너라.”해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보니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걷고 뛰고 하면서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는데 어느 좁은 골목에서 깡패들을 만난 겁니다. “, 운동화 벗어.” , 그 나이키 신발을 뺏겨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이 교수님이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나이키보다 더 좋은 신을 신고 사는 오늘, 내가 정말 행복한가?” 이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표이자 인간 존재의 종착지는 행복이다.” 고 했습니다. 행복이 목적이요, 행복이 종착지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애쓰는 것은 결국에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을 말할 때, 일단은 동물적 행복이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배고프다가 먹을 때, 졸리다가 잘 때, 병들었다가 건강해졌을 때,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이런 것들을 동물적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 행복은 이런 것만이 아니거든요. 더 높은 것이 있어요.

양심적이고 도덕적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죄책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있다면 잠자리가 편치 않습니다. 나로 인해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깨끗하게 웃을 수 없습니다. 내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먹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적 행복이요, 도덕적 행복이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철학적 행복입니다. 지적 욕구를 채워가면서 행복을 깨닫습니다. ‘, 이것이다.’ ‘이것이구나.’하는 만큼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행복은 영적관계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는 그 어디서든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했던 그 간증 말입니다. 하늘과의 관계, 하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많은 오해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이나 여건에서 찾으려고 하는 오해입니다. 이것만 좋아지면, 이것만 좀 더 나아지면 하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그 기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환영받고 인기를 누리는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합니다마는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중국 송나라에 정희라는 학자가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했습니다. 첫째는 일찍 등과하는 것, 이거 좋은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불행한 것이랍니다. 이 사람은 교만해지고 친구가 없고 한평생 고독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너무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특별히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불행이랍니다. 너무 못 만나도 걱정이지만 너무 잘나가는 부모를 만난 자식은 자기 인생 살기 힘들다는 거지요. 그리고 셋째는 너무 재주가 많은 사람, 재능이 너무 많은 사람도 불행하다고 했어요. 사실이 그래요, 재주 많은 사람 잘 되는 거 별로 못 봤어요.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야 한 우물만 파는 거지요. 이것도 저것도 건드려보는데 나중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일찍 출세하지 못한 것, 보통 부모 만난 것, 재주 없이 태어난 것, 그거 감사할 수 없겠어요? 이 수준에 올라서야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오늘 말씀,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듣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 글을 열 번, 스무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비결이 떠오를 것입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 보여 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칭찬받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래,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사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건강을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마저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 ‘네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그 고통, 그 고난, 그거 내가 준 것이다, 내가 너에게 준 그 육체의 가시, 그것이 은혜다. 그것으로 족하다.’

 

여러분, 이 은혜, 하늘의 은혜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하늘의 은혜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을 통한 의미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기에 신앙적 겸손이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이 이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가 교만이거든요. “저 실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라는 이 계교에 휘말린 거 아닙니까. ‘하나님처럼 될까봐.’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이 교만이 결국 오늘까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유혹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십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백만 원 주셨습니다. 백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천만 원 주셨습니다. 천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일억을 주셨습니다. 일억 받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그 순간, 그 사람,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공하고 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출세하고 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계속 겸손했더라면 더 큰 것을 주셨을 겁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은혜를 받는 한계이며 은혜를 받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디까지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인간은 스스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혹여 라도 나는 겸손하다.’생각하십니까? 그게 교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겸손하다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스스로 교만하다 하는 사람은 진짜로 교만한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합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가시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오늘 이 만큼이라도 겸손해 진 겁니다. 이것이 있고야 겸손해 진 거지, 나 스스로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겸손하지 못해서, 겸손케 하려고 그 사건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병들지 않았으면 나는 교만해질 사람이다,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나는 기고만장할 사람이다, 내가 실패하지 않으면 교만해 질 사람이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 자기 고백입니까?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비로소 내가 있다는 고백 말입니다.

 

겸손함으로 은혜가 은혜 된다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겸손 수준에 있습니다. 겸손한 만큼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겸손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15/06/08 10:27 2015/06/08 10:27

 

오늘은 포도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은 포도열매와 포도주입니다. 포도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얻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도나무를 발전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명함이나 명패 혹은 각종 감사패나 상장의 밑그림에 포도나무 넝쿨에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그림을 그려 넣은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으깨어져야 합니다. 다른 열매 주들은 으깨지 않아도, 형체 그대로 넣어도 과일주가 됩니다. 그런데 포도는 으깨져야 합니다. 그 형체가 하나도 남김없이, 그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기 까지 철저하게 으깨어져야 비로소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오래 묵어야 합니다. 푹 삭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나 어떤 단체이든 항상 걸레 같은 사람이 있고 행주 같은 사람이 있답니다. 행주는 깨끗한 곳을 닦는데 사용돼요. 그러나 걸레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사용되잖아요. 행주는 항상 위에 있지만 걸레는 언제나 바닥에 있어요. 행주는 손을 닦지마는 걸레는 언제나 발바닥만 닦아요. 행주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 있지만 걸레는 항상 그늘진 곳에 숨겨져 있어요. 행주는 말라있지만 걸레는 항상 젖어 있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그 곳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다 돌아간 그 자리에서도 마지막까지 언제나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레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살맛이 난다는 거지요. 하나님은 이런 분들을 귀하게 여기신답니다. 여러분, 우리 걸레와 같은 사람이 됩시다(표현이 이상하지만 그 뜻을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요 포도주는 그 동글동글한 포도열매의 형체가 다 짓이겨져야, 형체가 다 없어져야 비로소 포도주가 되기 때문이에요. 묵으면 죽을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라서 그래요.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진실해 져야 하지 않겠어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낮아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더 가슴을 쳐야하지 않겠습니까? 성경공부의 목적이 뭐예요? 그렇게 살기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래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네 풍토는 참 이상해요. 여러분이 다니시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초신 자들입니까? 오래 믿은 사람들입니까? 오래 믿은 사람들이에요. 집사, 권사, 장로들이라고요. 교회뿐만 아니에요. 어느 단체든 마찬가지예요. 오래 다닌 사람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켜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이무기라고 불러요. 묵을 때로 묵어가지고 똬리를 틀고 앉아서는 적당하게 조정하면서 내가 누군데.’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포도는 묵으면 묵을수록 그 진가를 드러내는데 어찌 인간은 묵으면 묵을수록 이무기가 되는지.

내가 녹아져서, 묵으면 묵을수록 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허물어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거기에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나무 열매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부디 남의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아십니까? 오래 믿으셨습니까? 이 직장을 오래 다니셨습니까? 더욱 겸손해서 많은 사람을 섬기고 함께 협력하면서 중심을 지키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성도와 교직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박정희 대통령 때 김 씨 성을 가진 육군 참모총장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분이 모 교회에 장로였어요. 군사정권시대에 육군 참모총장이면 소위 실세 아닙니까? 그런데 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는데 이 분이 바쁜 일정 때문에 참석을 못하고 있다가 어떻게 시간을 쪼개어서 마지막 날 저녁 집회에 참석을 하셨어요. 그래 장로석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이 웃기는 예화를 할 때는 반짝했다가 본문으로 돌아가면 졸고, 또 재미있는 예화를 하면 반짝 했다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조는 겁니다. 그래 부흥강사님이 손 마이크를 들고 장로 석에서 졸고 있는 그 참모총장 장로님 앞에 가서 큰 소리로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성도가 예배시간에 졸면 마귀가 와서 칩니다 하면서목 뒷부분을 한 대 치신 거요. 순간, 그를 아는 담임목사님과 교인들이 아찔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님께 정중히 묻습니다. “목사님, 이 부흥집회가 언제 끝납니까?” “, 내일 새벽 예배로 다 끝이 납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 새벽 집회 따 끝내시고 부흥강사님과 함께 저희 집에서 아침을 드시지요. 초대하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 담임목사님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온 교인이 다 보는 앞에서 참모총장을 건드렸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하면서 다음 날 아침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장로님이 살고 있는 참모총장 공관을 갔답니다. 그 장로님이 참모총장의 제복을 입고 마중을 나오셨는데 별이 열두 개가 떠 있더랍니다. 왼쪽 어깨에 네 개, 오른쪽 어깨에 네게, 모자에 네게. 그런데 이 별이 막내 동생뻘 되는 목사님 앞에서 정 자세로 서서 고개를 푹 숙이더랍니다. “목사님, 제가 소위 때부터 뺨하고 조인트는 제 것이 아닙니다. 하도 얻어 터져서 뺨하고 조인트는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만 넘기시고 기도만 하시는 그 여린 손으로 저를 깨우쳐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저의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가 예배를 우선으로 해야 하고 내가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그 부흥 강사님이 부끄러워졌어요. 혈기를 참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는 부흥회를 다닐 때 마다 이 장로님의 겸손을 소개하고 다니는 거예요.

 

독립운동가 조만식 장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시골 교회에 장로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젊은 전도사가 담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에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에 늦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설교를 전하고 있는데 조만식 장로님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뒤에 앉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시던 설교를 중단하고 큰 소리로 나무랍니다. “교인들의 본이 되어야 할 장로가 예배에 늦게 와서 되겠는가, 예배가 끝날 때까지 뒤에서 손을 들고 서 있으시오.” 그 전도사님의 말에 조만식 장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전도사님의 말씀대로 예배가 끝날 때까지 예배당 뒤에서 손을 들고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은 묵으면 묵을수록 그 진가를 더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묵으면 묵을수록 그 형체가 없어지고 그 형체가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그 맛과 향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이것이 포도나무의 특징이며 존재목적입니다.

혹 설익은 김치들이 제 맛이 좋다고 이래저래 품을 내지마는, 그래도 땅 속 깊은 곳에서 오래 묵은 묵운지 맛을 어떻게 따라 오겠습니까? 행주가 제 아무리 깨끗하다고 야단을 쳐봐도 걸레가 없으면 행주는 행주다울 수 없는 거 아니에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함께 협력함으로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2015/05/29 10:59 2015/05/29 10:59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 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기드온이 죽고 그의 아들들이 사사직을 이어받기 위한 쟁탈전에서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다 죽입니다. 그러나 요담이 그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나와 아비멜렉이 왕이 되도록 도와준 세겜 사람들에게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외치는 우화 이야기입니다. 어느 숲속에 나무들이 왕을 세우기 위해서 감람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 했더니 싫다고 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 했으나 모두 싫다고 했다. 그래서 가시나무가 왕이 되었는데 바로 너희들이 세운 아비멜렉이다, 이겁니다. 이 우화를 통해 요담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 인간들의 군상이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이 있고, 또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도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지난주에는 감람나무와 같은 인간 군상을 보았습니다. 감람나무(올리브나무)는 그 열매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고 기도하는 상징으로 사용하는 등불의 기름으로 사용되었고, 상처를 소독하는 기능으로 사용되었고,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위한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하는 사람, 상처를 깨끗하게 하고 정화시켜 나가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선전하는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나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녹아지는 그런 감람나무의 기름과 같은 사람이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느 숲속 이야기그 두 번째로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감람나무에게서 거절을 당한 나무들이 이제 무화과나무에게로 갔습니다. 10, 11절입니다.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며 나무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어요. 하나는 넓은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예요. 이스라엘은 무지하게 더운 나라예요. 밤에는 0도까지 내려가지만 낮에는 무지하게 무덥습니다. 그런데 변변한 그늘이 없어요. 이스라엘에는 큰 그늘이 될 만한 나무가 없어요. 그런데 무화과나무만이 잎사귀가 넓어서 그늘을 만들어요. 이게 땅에 심겨져서 큰 나무가 되면 여러 사람이 쉴만한 그늘이 된다고요. 더구나 이 나무는 가지가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올라가는 나무가 아니에요. 옆으로 삐쭉삐쭉 비틀면서 뻗어나가요. 그러니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그늘이 충분해진단 말입니다. 햇볕에 지친 사람들에게, 인생에 지친 사람들에게,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 쉼을 주고 새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는 그런 나무예요. 나도 뜨거워요. 나도 힘들고 나도 고통스럽지만 내가 만든 그늘 속에서 당신들이 쉼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무화과나무의 존재목적이에요. 여러분 주변에 그런 생각나는 분이 계시나요? 내가 외로울 때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만나고 싶은 사람, 속의 것을 다 털어 놓고 싶은 사람,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 그런 분이 주변에 계시나요? 그 사람이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당신 주변에 있다면 바로 당신도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없다면, 죄송하지만 당신도 아닙니다.

 

또 하나 무화과나무는 씨앗이 아주 많은 나무입니다. 그래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지면 수 십 수백의 무화과나무가 자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가 무지하게 많습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그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양식이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식량의 역할을 했다고요. 예수님도 전도여행을 하시다가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잖아요. 많은 사람들의 양식이었다고요. 열매와 열매속의 그 많은 씨앗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거예요.

영국에 (WEC)’이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회 건물의 지하실에는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님들의 짐들이 잘 정리되어 있답니다. 선교사님들이 선교지로 떠날 때, 살던 모든 것들은 여기 내려놓고 오직 성경 찬송가 하나만 가지고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그곳으로 떠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짐들 위에 불이 켜진 곳이 있고 꺼진 곳이 있더랍니다. 그리고 불이 꺼진 짐들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더랍니다. 그래서 여기는 왜 불이 꺼져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설명이 이랬답니다. “, 그것은 소식이 끊어진 선교사님들의 것입니다. 우리 선교회에서는 소식이 끊어진지 5년이 되면 죽은 줄 알고 장례식을 치러드리는데, 여기 불이 꺼져 있는 분들은 연락이 두절 된지 3년은 지났는데 아직 5년이 되지 않은 분들입니다. 우리 규정 때문에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로, 어느 나라로 간 분들이냐고 다시 물으니 중동으로 들어간 분들이 제일 많고요 다음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 등지랍니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해주시는 선교사님의 말씀 중에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 먼지 쌓인 물건들 중에는 세발자전거가 눈에 띄더랍니다. 그 세발자전거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더랍니다. 아버지 엄마는 주님의 사명을 알고나 죽어갔겠지만 저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던 세 살, 네 살 박이 아이들은 어떻게 죽어갔을까. 돌에 맞아 죽었을까. 독사에 물려 죽었을까.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을까.

 

여러분,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를 봐도 이런 많은 씨앗들의 열매들을 볼 수 있어요. 서울 마포구에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치욕적인 장소이며 동시에 가장 거룩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구한말 시대에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장소로 절두산(사람의 목을 자르는 곳)’ 이라는 이름이었고, 1986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명된 곳입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밀알이 된 많은 선교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그 중 캐나다 사람 윌리엄 제임스 홀(Hall, William James, 1860-1894)은 부인과, 아들과 딸, 며느리와 손자, 이렇게 3대가 누워있습니다. 제임스 홀은 평양에서 많은 환자들을 돌보며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발진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부인과 두 살 된 아들, 임신7개월 중에 있는 뱃속 아이를 두고 34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 부인 로제타 홀은 죽은 남편의 시신을 마포 양화진에 묻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배속의 아이를 낳고, 남편이 다녔던 캐나다 교회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제임스 홀이 죽은 것을 알면서도 그 교회에서는 제임스 홀의 선교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제임스 홀의 이름으로 한국에 선교 후원금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로제타 홀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남편의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딸이 3살 때 한국 풍토병으로 죽습니다. 로제타는 죽은 아이를 소달구지에 태워 평양에서 마포 양화진까지 끌고 옵니다. 남편의 무덤 옆에 묻습니다.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내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여기에 묻었으니 나도 이 땅에 묻히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편의 일을 합니다.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큰 병원을 세웠는데 그 병원이 기홀 병원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대문에 병원을 세웁니다. 그 병원이 지금 목동으로 옮겨진 이화여대병원의 전신이 됩니다. 그 병원에서 의사 겸 약제사로 활약하다가 1951년 죽어서 그 남편의 옆에 묻힙니다.

한편, 아버지 제임스 홀이 죽었을 때 2살이었던 그 아들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은 의사가 되어서 우리나라 최초로 해주에 결핵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개설합니다. 그리고 영농기술을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셔우드 홀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씰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한국을 떠났다가 선교사역에서 은퇴한 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1991919일에 그 부모와 여동생이 묻힌 양화진에 같이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한국에 태어난 그 날 죽습니다. 그래서 양화진에는 홀 가문 3대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양화진에는 죽어서도 말 하는 사람들’ 555(20048월 현재 발굴현황)이 누워있습니다.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들,’ 이 무화과나무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복음과 구원의 역사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무화과나무에는 또 다른, 아주 신비스러운 비밀 하나가 있습니다. 무화과는 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화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은 꽃이 있습니다. 있는데, 숨겨져 있습니다. 열매 속에 꽃이 숨겨져 있는 아주 특이한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꽃이 없어서 무화과가 아니라, 꽃이 안보여서 무화과입니다. 열매 속에 숨어있으니까.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영광은 하늘의 것이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가 323장의 마지막 부분이 그 간증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는, 그늘을 만드는 잎이 꽃이요, 사람을 이롭게 하는 그 열매가 꽃이요, 널리 씨앗을 퍼트리는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몸부림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소망합니다. 아멘.

2015/05/13 14:02 2015/05/13 14:02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 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이 사사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150년 전, B. C. 12세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왕정정치가 있기 바로 전에, 그러니까 왕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떤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을 받는 사람을 사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귀에 익은 삼손이 사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이 사사가 13명이 있었는데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는 기드온 이라는 사사의 아들들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식을 낳은 일에도 무지하게 열심히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아들이 무려 70명이 됩니다. 딸까지 합하면 엄청난 숫자이지요. 그 부인들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한 밥상에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며 끔찍스럽지 않습니까? 사랑을 고백할 때도 그렇지 않겠어요? 앞에 있는 가장 아름답고 젊은 부인에게 여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당신 사랑해. 뒤로 전달.’ 그러지 않았겠어요. 제일 든든한 아들에게 아들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너 알지? 뒤로 전달’.

 

어쨌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기드온이,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그 사사라고 하는 그 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진 거예요. 서로 으르렁거리는 거라. 그런데 그 중 많은 아들 중에 서자,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명함도 못 꺼낼 판인지라. 그래서 아비멜렉이 그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으로 가서 그 부족들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자극합니다. “나를 밀어 주시오. 내가 왕이 되면 당신들의 은혜는 잊지 않겠오. 어머니의 고향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어야 되지 않겠소.” 하면서 충동질을 합니다. 그리고 지원금을 받아내서 그 돈으로 킬러를 고용합니다. 그래서 하룻밤에 그 이복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무시무시한 일이지요. 그런데요, 그 이복형제들 중 제일 막내인 요담이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이 요담이 분노를 하면서 먼저 아비엘렉에게 돈을 되어준 세겜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요. 세겜의 그리심산 꼭대기에 서서 세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당신들 그럴 수가 있느냐하면서 책망을 하는데 그 내용이 사사기 9:7-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하는 것이 직설적이지를 않고 우화적으로, 돌려서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합니다. “어느 숲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면서 설명을 하는 겁니다. 숲속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뽑는데 먼저 감람나무에게 가서 우리의 왕이 되소서.” 하였더니 싫소.”하였다. 그래 무화과나무에게 갔더니 역시 싫소.”하였다. 이제는 포도나무에게 갔더니 역시 싫소.”하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갔더니 그가 왕이 되어서 숲을 황폐화 시켰다는 요담의 우화입니다.

 

! 여기에 네 나무가 나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입니다. 우화는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군상들의 이야기를 돌려서, 우회적으로 말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사에 감람나무 같은, 무화과나무 같은, 포도나무 같은, 가시나무 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성경적 카테고리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네 그루의 나무들을 보시면서 말입니다.

 

오늘은 감람나무입니다. 본문 9:8-9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우리말로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를 말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올리브나무는 그 열매에서 기름을 내는데, 올리브유라고 합니다. 당시 올리브유는 세 가지로 사용되었는데요, 하나는 성전의 불을 밝히는 등전의 기름으로 쓰였습니다. 당시의 성전에는 항상 두 개의 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불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등불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건강한 교회나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는 이 두 개의 등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는 기도의 불이 타올라야 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신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증거 하는 불이 항상 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의 재료가 30%의 몰약(향수)70%의 올리브유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리브유가 타면서 향을 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올리브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은 불을 붙여보면 압니다.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붙여보면, 순도 100% 올리브유라면 그을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을음이 생기면 가짭니다. 진짜 올리브유는 그을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9절에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기름입니다.

 

두 번째로 올리브유는 소독약으로 쓰였어요. 우리 어렸을 때에 모기에 물리거나 상처가 생기면 할머니들이 침을 바르거나 된장이나 간장을 바르고 하지 않으셨어요? 당시에는 의학이 발달되기 전이라 몸에 상처가 생기면 올리브기름을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올리브기름에는 소독의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능은 여인들의 화장 기능으로 쓰였다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들이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반드시 빗어 올리는 것 보셨죠? 당시에도 올리브기름은 여인들의 아름답게 하는 화장품과 향수로 사용되었어요.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가 증거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있음으로, 여기에 내가 있음으로 인해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고, 정화되어지는 그런 역할의 사람을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이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알브레토 듀로라는 프랑스 사람이 그린 그림입니다. 듀로와 그 친구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시골에서는 더 공부를 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은 뜻을 합하여 도시로 옵니다. 그러나 열심히 돈을 벌어도 미술 공부는커녕 먹고살기조차 힘이 듭니다. 그래서 듀로의 친구가 제안하기를 내가 먼저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서 네가 미술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나중에 네가 성공하면 그 그림을 팔아서 내가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자해서 친구는 식당에 취직을 해서 설거지를 하면서 듀로가 미술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합니다. 어느 듯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듀로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듀로는 자기 그림을 팔아서 그 친구를 찾아갑니다. 이제는 그 친구가 미술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느 겨울, 듀로는 주소를 들고 친구가 일하고 있는 식당을 찾았는데 시골 허름한 작은 식당이었습니다. 친구는 거기서 기거하면서 돈을 모아 듀로에게 보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식당 앞에 선 듀로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그 친구가 창문에 비춰집니다. 창문을 넘어 흘러나오는 친구의 기도소리에 듀로는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제 나의 손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감각도 모두 잃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 알브레토 듀로에게 내가 가진 미술의 재능까지 다 주십시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순수한 영혼들의 모습을 그리게 하소서.” 기도하는 친구의 손은 다 터져 있었고 그 터진 손위에 친구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듀로의 눈에도 눈물이 고입니다. 그 그림이 바로 알베르토 듀로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기도하며, 자기를 태우며 불꽃을 드러내는 사람들, 향기로 하늘 바람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의 존재이며 자존심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옆의 사람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 줍시다. “당신이 바로 감람나무였군요. 당신으로 우리가 있습니다.”

 

감람나무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소독하고 정화하며, 동료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 내가 그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감람나무의 기름과 같은 사람 말입니다. 아멘.

2015/05/07 10:29 2015/05/07 10: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또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권하고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어린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을 때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엄마는 왜 젖이 두 개냐? 하나는 먹으라고 있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 아버지는 돈 벌어 오는 사람이고, 형은 내가 올라타고 놀라는 거다. 내가 왕이다.’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이렇게 자라면서 조금씩 자기의 왕권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가 왕 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가 왕이에요. 그리고 또 형이 있어요. 자기는 맨 꼴찌인거라. 여기서 혼란이 생긴다는 거지요. 무너지는 자기 세계관을 다시 세워야겠는데, , 이 혼란을 바로 정리해 가면 좋겠는데, 만약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게 되면 이게 문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철이 난다는 게 뭡니까? 첫째는 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둘째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그리고 셋째는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이 필연이다, 작은 일 하나라도, 사소한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다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알 때,’ 이럴 때 철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큰 뜻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른다워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25)에는 직분이라고 했고, 새번역 성서에서는 사명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직분(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혹은 섭리(dispensation)’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섭리를 현대적 용어로는 ‘divine plan’라고 합니다. ‘왕의 큰 계책’, ‘거룩한 계획’,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큰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마는 이 큰 계획, 이 섭리에 이끌려 내가 존재하고 있다, 이 섭리에 안에서 직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철이 난다, 어른스러워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느끼십니까? 첫째는, ‘내가 혼자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울 수도, 웃지도 못합니다. 표정관리를 내 마음대로 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나 하나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 어렵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는 것을 점점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나는 빚진 자다. 갚을 길이 없는 빚을 지고 산다.’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듭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신세진 사람들만 생각나요.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준 분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이 계셔서 오늘 내가 이만큼이라도 있는 것이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산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이 하늘의 은혜였다.’하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도 은혜 중에 짓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죄를 못 짓게 벼락을 쳤더라면 죄 지을 수 있었겠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내가 내 돈을 헌금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돈을 하나님께 드릴 뿐입니다. 얼마를 헌금하던, 그 얼마를 헌금할 수 있도록 물질의 축복을 주셨으니 그 얼마라도 헌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요? 아니요. 오히려 내가 십의 구조를 쓰고 있는 거라고요. 이걸 알아야 돼요. 그저 하나님의 손에 이렇게 저렇게 쓰여 지고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감사뿐입니다. 이 부족하고 이 허물 많은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임 받아서 감사합니다. 이게 철이 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쓰시고 계십니다. 그 감격에 삽니다. 바울 사도가 한 평생 안고 산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요 박해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포로로 만드셔서, 나를 잡으셔서, 강권적으로 나를 체포하셔서 포로 된 인생을 산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렇게 사용하신다 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 나는 그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고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먼저 그 일을 행하셨다. 나는 조금씩 그를 배워갈 뿐이다. 그가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나는 그를 조금씩 닮아 가면서 매일 죽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가 먼저, 그가 먼저, 그가 먼저... 그런고로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속에서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은혜 속에서 이해하고 은혜 속에서 해석합니다. 이게 바울의 신앙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이 직분이 하나님의 섭리로 내게 맡기신 것이기에 추호도 자랑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916절에서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특별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데 왜 그렇지 않겠어요? 이 큰 은혜 속에 내가 있다, 이것이 선택된 자아요, 선택된 현실이요, 선택된 사건입니다. 내게 주신 경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경륜, 이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철학을 다룬 마더 테레사의 단순한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단순함에 대해서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함이란 기도하고 관상하는 삶과 행동하는 실천적 사랑 사이에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와 실천, 그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 경륜을 깨닫고, 그리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복잡하십니까? 머리를 굴리기 때문입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당신이 복잡한 겁니다. 당신이 복잡해서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굴리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기도와 실천’, 단순함이 문제 해결의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큰 경륜, divine plan, 나를 향한 거룩한 계획을 먼저 생각합시다. 그리고 나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현재를 생각합시다. 그러면 실패는 또 다른 성공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며, 불행은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역경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고, 현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기도 응답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아가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015/03/25 11:33 2015/03/2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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