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5:1-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가 히틀러를 반대하다가 옥에 갇혀서 35세의 나이에 순교를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이 편지들이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는데 이를 옥중 서신이라 합니다.

히틀러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때, 본 회퍼라는 젊은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외칩니다. “어느 미친 버스 운전사가 만취 상태에서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치면서 차를 몰아가고 있는데, 만약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뛰어다니면서 그 차에 부상을 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루어 주며, 또 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이렇게만 한다고 해서 되겠느냐? 기독교인이라면, 아니 누구든지 그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되지 않겠느냐?” 아주 패기 있는 설교가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본 회퍼가 순교당하기 직전에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더랍니다. 히틀러가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더래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를 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피를 흘렸으니 너는 지옥으로 가라!” 그랬더니 히틀러가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죽어서 이런 세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구 하나 내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내게 그렇게 전도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항변을 하더랍니다. 본 회퍼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답니다. “주님, 저는 저 사람을 끌어 내릴 생각만 했지, 저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잘못이요 제 허물입니다.”하고 회개했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학적으로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주 비유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혁명신학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0년도에는 도시산업선교로, 80년도에는 민중신학으로 발전되면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 사회주의적 기독교가 만연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래, 히틀러를 위해 기도해 봤냐?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봤냐? 인간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것이 복음주의입니다.

 

오늘 본문의 잃은 양 비유는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갖은 고생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가시는,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적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피할 수 없는 시빗거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두고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자가 없는 사이 짐승들이 달려들면 그 아흔 아홉 마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차라리 한 마리 잃는 것이 났지 그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를 잃어서야 되겠느냐?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거, 충분히 시비를 걸만도 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난센스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지금 내 앞에 하나의 금시계가 있고, 한 줌의 콩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거 물어 보나마나한 질문을 왜 하느냐고요? 그런데 상황을 바꿔놓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무인도입니다. 나 혼자만 살고 있는 무인도라고 합시다. 그때도 내 앞에 하나의 금시계와 한줌의 콩이 있다면... 이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는 당연히 콩입니다. 콩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콩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법칙에서 본다면 당연히 금시계이지요. 그러나 생명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줌의 콩이어야 합니다. 경제적 가치에서 본다면 아흔 아홉 마리가 더 가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서를 대할 때 경제적 시각으로 보는 한, 성서는 침묵하고 맙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 “까짓것 그 한 마리쯤이야해 버린다면 성서는 침묵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경제적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봅시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그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가 당신이라면, 그 한 마리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경제 운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 한 명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크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목자는 생각합니다. “저 한 마리가 아차 잘못하면 죽고 말겠구나. 어디선가 맹수에게 찢겨죽지는 않을지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바로 그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행위, 찾아나서는 겁니다.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목자가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은 자기발로 찾아오지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순하기는 하지만 멍청한 동물입니다. 갔던 길을 돌아오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의 생각에는 내가 저에게 가지 않으면 저는 내게로 올 수가 없다. 내가 가서 도우지 않으면 저 양은 죽고 말 것이다.’ 이는 결정적인 사건이요 보나마나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요, 그 행동적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목자는 저를 원망하거나 심판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한 마음, 초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맵니다. 오늘 말씀을 새번역 성서에서 보시면 찾을 때까지 찾지 아니하겠느냐?” ‘찾을 때까지 찾지 않겠느냐.’ 기어이 찾겠다는 강한 의지, 반드시 찾겠다는 강한 의지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다가 찾았을 때 그는 너무도 기쁘고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크게 기뻐하면 잔치를 벌였다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또 하나의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시빗거리입니다. 이 한 마리를 찾은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으니 그 잔치 때문에 몇 마리의 양이 죽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잔치를 벌이면 술을 빚고 떡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은 양고기입니다. 자기가 멍청해서 길을 잃은 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몇 마리가 죽었을지 모를 일이란 말입니다. 이게 만만치 않은 시빗거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빗거리를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될까요? 여러분은 혹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건강 감사헌금은 건강할 때 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건강할 때 감사헌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병원에 입원을 해서 큰 고생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건강 감사헌금을 하더란 말입니다. 병원비도 어렵게 구해서 낸 판국에 감사헌금까지 하더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건 경제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거든요. 돈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는데 여기에 무슨 타산이 필요하겠습니까? 따지고 계산할 것 없습니다. 오로지 감격,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 없어져도 좋다, 나는 나대로 즐겁다. 이 정도의 감격이라면 정말 멋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이러한 경험을 한번쯤은 맛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 큰 병에 걸려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이제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다 주어도 좋다. 다 바쳐도 좋다.”하는 이런 즐거움, 이런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타산적이거나 이기적인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즐거워하는 이 마음, 이 기쁨, 이것이 목자의 기쁨이요 오늘 본문의 목자의 감격이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이심을 비유해주고 계십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불쌍한 인간들이 언제쯤이면 깨우치고 돌아올까 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찾아 가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지극히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1:1의 관계에서, 나 하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나를 살리려하시다가, 나를 살리시려 자기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고로 십자가는 나를 살리신 표적이며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중보의 흔적입니다.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너 왜 이랬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것을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구원을 해 놓고 볼 일입니다. 우선 속량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찾으십니다. 이 아침에 말입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이 말씀을 통해서, 이름 없는 한 전도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아무개야하고 부르시며 찾으십니다. 찾으셔서, 찾은 것만으로 너무나 기쁩니다. 그러니 책망도, 훈계도,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의롭다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의롭다하시는 사랑으로 의롭지 못한 양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양은 감히 주인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덮음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덮어 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 감격할 뿐입니다. 아멘.


2014/07/25 09:06 2014/07/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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