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9-12)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전서 12:20-27)

상담학자인 제랄드 메이가 <사랑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동네에 성품이 아주 괴팍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놀기 시작하자 노인은 철조망을 쳐서 마당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루는 아들 폴이 기르는 고양이가 그 집 장미 덩굴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폴은 고양이가 그 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노심초사했습니다. 며칠 후, 결국 고양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노인이 쥐약을 놓은 것입니다. 가족들 모두가 분노해서 복수를 상상하고 있는데 아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한참 후 아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우 외로운 분 일거예요. 우리가 그분에게 생일 파티 같은 것을 해 드렸으면 좋겠어요.” 이 어린 천사는 우리에게 이웃 되어주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 정치계를 향해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유난히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통(疏通)’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통이었으면 소통활성화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마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소통되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할 때 뜻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으로 우리혹은 함께라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함 이 없으면 는 있지만 우리혹은 상생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종일관 협동’, ‘함께그리고 우리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혼자 걷는 것 보다는 함께 걷는 것이 좋고, 혼자 눕는 것 보다는 함께 눕는 것이 따뜻하고,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함께 싸우는 것이 승산이 높다,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부하다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개인주의가 자유를 상징하는 편안함의 의미도 있지만, 이 개인주의적 자유에는 피할 수 없는 정신적 질병이 있습니다.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에 취하고, 쾌락으로 도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우울증도 이 외로움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게 이중적인 마음에 힘들어 합니다.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소속감은 삶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직장은 서로에 대한 낯섦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거든요. 성별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학력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공동체, 한 가족으로 묶여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0부터의 말씀입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24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퍼즐 맞추기를 아시지요? 퍼즐이 백 개냐, 천 개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 천, 수 만 개의 조각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단 한 개, 단 한 개의 존재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단 한 개만 빠져도 그림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조각 한 개, 한 개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일 때 바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퍼즐이요, 이것이 연합이요, 이것이 하나 됨 입니다.

 

경상남도에 거창 학원이 있는데, 샛별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그림을 전시 할 때나, 문집을 만들 때나 잘 된 작품들을 가려서 전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학생들의 작품을 다 전시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한 명 한 명, 그리고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참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열을 가려서 아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열등감을 내면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그리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고전 12:20-24)”

 

지체들을 다 짜 맞추셔서 어울리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퍼즐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어울림을 뜻합니다. 어울림은 조화이며 조화는 협동함께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기의 원칙과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어울림과 조화의 원칙과 중심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일으켜주고 세워주고 서로 대접해 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몸부림칠 때 비로소 소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일 때 구를 수 있듯이,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과 정신이 중심이 되어 각 부서 부서로 연결되어 서로 일으켜주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대접해 주는 바퀴살이 될 때, 어울림과 조화로 인한 상생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19-20).”

 

여러분, 하나님의 경영원리는 경쟁이 아닙니다. ‘협동’, ‘어울림’, ‘조화’, ‘상생입니다. 혼자서 열 걸음을 걷는 것보다는 열 명이 함께 걷는 한 걸음이 더 아름답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함께하신 여러분, 이 설교문을 대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우리부터 어울림의 촉매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각자의 기능이 있고, 고유 영역이 있습니다. 일으켜주고, 세워주고, 서로 대접하여 어울림의 촉매자가 되어봅시다. 세 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지요?

 

그 길이 멀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 길을 힘써 택할 겁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는 길이기에, 이 어울림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 질 것이라 믿습니다.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말입니다.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어느 여자 대학교의 광고문입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머물지만 우리가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아멘.

2014/08/22 09:07 2014/08/22 09:07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요즘, 결혼 정년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답니다. , 그렇게 늦게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아이도 늦게 가지겠답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까지 누려보자는 겁니다. 결혼도 아이도 구속물로 본다는 것이지요.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동물 지능의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열다섯 살 난 침팬지 와슈에게 수화(手話)를 가르치고 온갖 노력을 다해 140개의 단어를 가르쳤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의사를 표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Let me out. 나 좀 놓아 달라.” 그랬답니다.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감옥에서 거의 한평생을 보낸 한 노인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 드디어 출감을 하게 됩니다.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감한지 몇 일만에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감옥안의 한 죄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영감, 내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냥 이 감옥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자유로웠고 행복했을 거야.”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정말, 자유가 무엇인가? 자유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자유에 대한 개념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freedom from, 무엇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freedom for,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가 출근을 해서 여기 있는데,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온 것, 집에서 벗어난 발걸음에서 자유를 누리십니까? 아니면 직장으로 향한 내 발걸음에서 자유를 누리십니까? 대답하기 조심스러우시죠? 구약성서의 출애굽사건을 예로 들면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냐, 아니면 가나안을 향한 탈출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남이 내게 자유를 준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단지 풀어 놓았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다니게 한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것이지요. ,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자유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란 단순히 자유로운 환경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되거나 풀려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해방 69주년을 맞습니다. 자유를 얻은 지 69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미 69년이나 흘렀지만, 문화적으로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감정의 잔재들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국제 경기를 할 때,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할 때와 일본과 경기를 할 때 응원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과 경기를 할 때는 그렇게 흥분할 수가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단은 이겨놓고 보자는 식입니다. 무조건 이겨야 된답니다. 언제쯤이면 이 감정이 좀 가라앉을까요?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나라라고 욕을 하지만, 중국은 안 그런가요? 미국은 안 그런가요? 그런데 왜 유독 일본에게만은 이렇게 흥분을 하는 것일까요? 자유는 했는데 자유인으로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자유는 있었는데, 자유는 있는데 자유인이 없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넌센스가 아니겠습니까? 자유는 있는데 자유인이 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이란 누구를 속박하는 것도 아니고 속박을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 자유인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적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23절에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라고 강조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종, 진리의 종이 되었으니 이후로는 절대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욕심의 종이 되지 말고, 권력의 종도 되지 말고, 재물의 종도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보여 지는 것에 너무 유혹받지 말라는 겁니다. 보여 지는 것에 아예 신경을 끄고 살아도 문제지만 너무 지나친 것도 큰 병이거든요. 간혹 젊어 보이십니다.”하면 진짜 젊어진 줄 알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름살 제거 수술하고, 잔뜩 위장해봤자 그 얼굴은 그 얼굴이에요. 대충사세요. 사람에게 신경 쓰고, 사람의 눈치 보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여러분 진정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진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솔직함, 진실, 여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있는 척, 아는 척 하는 여기에 괴로움이 있고 속박이 있습니다. 없는데 있는 척 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모르는데 아는 척 하려니 얼마나 진땀나겠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요, 이 겸손 속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대로우리에게는 분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은 조건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아이큐도 다르고, 조건도 다릅니다. 건강도, 나이도, 지식도, 능력도 다 다릅니다. 이 다름의 한계 안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내게 향하신 뜻이 있고 나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계 밖으로 넘어서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얼마간의 재산이 주어집니다. 부족한 듯싶겠지만,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세요. 내가 거두어들인 곡식이 부족하다고 원망하지 말고, 내게 주신 이대로의 선물로 받아들이십시오. 설령 내 마음에 족하지 않더라도 내게 주신 다름, 그와 다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 자유 함이 있습니다. 이 자유 함으로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이 과장만 되면 자유 할 것처럼 보입니다. 과장이 되고 보니 부장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이 되고 보니 이사가 되면 더 자유 할 것 같습니다. 정작 사장이 되고 보니 책임이 너무 무거워 건강을 잃어버리더랍니다. 여러분, 자유 함이 사장의 자리에 있는 것도, 회전의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위든 사장이든, 이 자리든 저 자리든,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자유 함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신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유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더 질적인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환경에 끌려가지 마십시오. 내가 처한 환경 이외에 다른 환경에 자유 함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 내 처한 이대로, 여기에 자유 함이 있습니다. 내 처지를 은사로 받아야 합니다. 내 처지를 부르심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 처지를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처지 이대로, 여기에 엄청난 사명과 뜻이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여기에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병원에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무척이나 고생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은 뵙기에도 민망하고 별반 위로할 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분이 찾아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병원에서 참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병원에 오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전도해 보았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말을 건네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기 위해 누워있는 사람에게는 나는 세 번이나 수술 받았습니다.’ 하고, 입원한지 한 달된 사람에게는 나는 삼 개월째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건네며 위안도 주고 조언도 하였지요.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병들고 나이 들면 아무 일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일이 더 많아요. 더 소중하고 더 거룩한 일이 내게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이렇습니다. 자유 하는 환경이 있고야 자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인이 되고야 자유 하는 것이다. 자유인이 되어야 참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 합니다. 내 처한 이대로가 하나님의 뜻이요 내게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기에 그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자유 하는 것입니다. 자유인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4/08/13 13:15 2014/08/13 13:15

카테고리

전체 (355)
대장암 이야기 (144)
교수님들의 소식 (22)
대장암 센터 소식 (17)
무엇을 먹을까요 (52)
소화기관 질환 (14)
마음이 쉬어가는 곳 (26)
믿음의 말씀 (31)

공지사항

달력

«   2019/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tatistics Graph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