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다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 모습은 그가 극단적 상황에 접하게 될 때, 그 가면 속에 숨겨졌던 정체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설명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이시다되셨다하는 것입니다. ‘To be’ ‘To become’의 문제입니다.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존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시요, 능력이시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사람 되셨고, 고난 받으셨습니다. 능력이 있는 자이지만 없는 자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의인이시지만 죄인으로,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의 모습으로, 스스로 낮추어 나타나셔서 그의 뜻을 이루셨다 해서 비하라고 합니다. 그의 하나님이심과, 그리고 사람 되심과 고난 받으심.

그런고로 우리가 이런 눈으로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당하심입니다. 수난 당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 죄인 되신 하나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고난당하실 분이 아닌데 고난 당하셨습니다. 여기에 권세의 침묵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대로 말하면 ‘the hidden Word,’ ‘the hidden God,’ 숨겨진 말씀, 숨겨진 하나님. 말구유에 숨겨졌고,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숨겨져 있다가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을 합니다. 가르치는 것으로, 병자를 고치시는 것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으로 그의 하나님 되심의 권세가 조금씩 드러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시는, 구세주가 되시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으로 분명해지고 선명해지고 확실해 집니다. 십자가로 인해 그동안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신 그 모든 일들이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게 되고 그 능력과 그 권능이 재해석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소위 빌라도 법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백성들 앞에서, 아니,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요. 역사에 딱 한 번 있는 엄청난 사건 앞에 빌라도가 당면한 것이거든요. 그는 몹시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억울하게 잡혀 왔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시기와 질투와 음모 때문에 여기 끌려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한마디쯤은 변명을 할 것도 같은데, 예수님은 말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구차한 변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담담히 서 계십니다. 이것이 빌라도로 하여금 더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또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능력을 얼마나 행했다는 것을.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 바다를 고요하게 했다는 것,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는 것,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왜 빌라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 예수가 어찌하여 이 결정적 시간에 능력을 나타내지 않느냐는 거예요. 왜 이 시간에 무능하게, 초라하게 이대로 서 있느냔 말입니다. 어째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렇게 조용하냔 말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를 섬기려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해 나를 대속물로, 제물로 내어 주려고 왔다는 것이 분명하십니다. 시작이 그러했으니 마지막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을 이루려하시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것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며 삽니다. 섬기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섬길 것이요, 봉사하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봉사해야 하겠는데, 그런데 이게 흔들리거든요. 시작은 섬기려했는데 어느새 섬김을 받으려 하고, 시작은 봉사하려 했는데, 이제 와서 알아주느니 안 알아주느니,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결심하신대로 행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사시고,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출발하셨고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계십니다.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죄가 없다는 것을. 4, 6절에 보시면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심지어 10절에는 내가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를 놓아줄 권한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빌라도, 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자라면 알게 하면 되겠지만, 다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침묵일수 밖예요. 아무리 화려한 세계가 내 눈앞에 전개된다 하더라도 잠자는 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바른 법을 행치 못하고 벌벌 떨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빌라도 앞에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침묵은 대화의 중단이 아닙니다. ‘침묵만큼 더 확실한 응답이 또 있을까? ‘침묵만큼 확고한 대답이 또 있을까. 바로 어젯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의 뜻을 받아들이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하시는 그 순간 모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 후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상관없습니다. 누가 배신을 하든, 누가 침을 뱉든, 누가 욕을 하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침묵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오히려 두려워했다고요.

 

일본의 기독교 작가 엔도슈사꾸가 쓴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후무에라는 사상 조사법이 있습니다. ‘후무라는 것은 밟는다는 뜻이고 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식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나 마리아상을 그린 그림을 밟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처음 만들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인을 살려주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림인데 밟고 지나가면 어떠냐? 밟고 지나가면 산다, 하고 살려주기 위해서 만든 법인데, 그런데 의외였습니다. 후무에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을 줄 몰랐답니다. 여기에 포루투칼 신부인 세바스찬 로드리꼬 신부가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 앞에 서게 됩니다. 밟으면 살고 피해가면 죽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주저합니다. 그럴 때에 신부의 귀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로드리꼬, 나를 밟아라. 밟아라.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하느니라. 밟는 네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도 충분하니라.”

천주교 신자인 농부 두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십자가 형틀에 농부를 끌어매어 바닷가에 박아놓습니다. 밀물이 되면서 그들의 다리, 허리, 가슴, 목으로 차오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부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죽어갑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로드리꼬 신부는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도와주십시오. 어찌하여 침묵만하고 계십니까?” 신부의 귓가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침묵,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있고, 우리를 향한 기다려 주심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용서가 있습니다. 여기에 신비로운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조용히 주님의 길을 생각합니다. 골고다의 길,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멘.

2015/04/02 09:32 2015/04/02 09: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삼년동안 역사하신, 그러나 그 모든 역사 중에 마지막 일주일이 결론이요 온 생애의 축소적이며 함축적인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을 고난주일, 그리고 그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기독교의 고간주간의 의미는 한 사람이 고통을 당했고 그리고 고난 속에서 깨우치고 그리고 최종 승리를 했다는 그런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오셔서, 자원적으로, 스스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그 계시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특별히 생각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이시다’와 ‘되셨다’하는 것입니다. ‘To be’ 와 ‘To become’의 문제입니다.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To be’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To become’의 문제입니다. 그는 존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시요, 능력이시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사람 되셨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비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낮추어서, 능력이 있는 자이지만 없는 자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의인이시지만 죄인으로,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뜻을 이루셨다 해서 ‘비하’라고 합니다.

그의 하나님이심과, 그리고 사람 되심과 고난 받으심, 그런고로 우리가 이런 눈으로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당하심입니다. 수난 당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 죄인 되신 하나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고난당하실 분이 아닌데 고난 당하셨습니다. 여기에 권세의 침묵이 있는 것입니다.


‘권세’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스우시아’라고 합니다. ‘엑스’는 ‘무엇으로부터’,라는 뜻이고, ‘우시아’는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엑스우시아’는 ‘본질로부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하는 것은 그 본질로부터 유출되었다 하는 것이며, 그 유출된 사건을 ‘권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가 숨겨졌습니다. 말구유에 숨겨졌고, 한 목수의 아들에게 숨겨졌고, 갈릴리 선지자에게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권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이 계시를 통해 나타난 사건이 병 고치는 일이요, 기적을 행하시는 일이요, 말씀을 전하신 일이요, 십자가의 사건이요, 또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라는 말을 너무 신비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한 전도자의 입을 통해 말씀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이런겁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To be). 그런데 사람 되셨습니다(To become). 그 계시의 하늘 바람이 오늘, 여기에까지 역사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발 씻기는 것과 발 씻김을 받는 것,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발 씻길 수도 있는 것이고 발 씻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가 씻겼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누가 씻겼다는 것을 잊지 마라! 주인이 되어 종의 발을 씻겼고, 스승이 되어 제자의 발을 씻겼고, 의인이 죄인의 발을 씻겼고, 하나님이 인간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오늘 모르겠다면 장차에라도 생각해보라. 이제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리라. 그가 하나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기에 내 더러운 발을 씻기셨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 성전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전해야 할 제사장들, 그들은 조그마한 이득에 눈이 어두워 장사치들로부터 웃돈을 받아가며 좋은 자리를 알선해 주는, 아니 몫이 좋은 자리를 두고 값을 흥정하는, 그래서 검은 돈에 눈이 어두워서 부정을 묵인함으로 성전 뜰이 장사치들의 마당이 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때, 예수님은 그냥 묵과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채찍을 만들어 모두 내 몰았습니다. 깨끗이 내 몹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어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이 사건 뒤에 제사장들의 체면은 말이 아닙니다. 체면과 위신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 부득이 나타나서 저들은 무너지는 위신과 없어진 양심을 챙기느라 억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뇨.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너의 배후 세력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네 배후에 누가 있기에 감히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묻겠다. 나의 물음에 답하면 나도 대답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너희는 대답하라.” 이 사람들 자기들끼리 의논해 보았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왜 너희가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많은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저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고, 그러니 좋은 방책이 없다,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알면서도 모른다고 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말하지 아니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나도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마음의 문을 닫으니 나도 닫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대답을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 여기에 권세의 침묵이 있습니다. 안 하기 때문에 침묵입니다. 왜요? 왜 안하는 것입니까? 왜 말씀하지 않는 겁니까? 여러분, 듣지 않는 자에게는 침묵일 수밖에 없잖아요. 아무리 화려한 세계가 내 눈앞에 전개된다 하더라도 잠자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자에게 말씀이 침묵될 수밖에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제사장들, 체면과 위신과 다 무너진 체통만 챙기느라 주님이 주님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신, 불신 때문입니다. 이 침묵의 원인은 제사장들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침묵은 배교와 배신에 대한 심판입니다. 양심의 배신, 회개의 기피, 신앙을 버린 사람들에게 내리신 심판, 진실을 포기한 자에게 내리시는 결정적 심판입니다. 여기에 침묵이 흐릅니다.

침묵은 무식이 아닙니다. 무능도 아닙니다. 대화가 중단되었을 때 흐르는 어색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을 버린 자에게 내리시는 포기이며 심판입니다. 가장 큰 심판입니다. 진실을 버린 자를 심판하십니다. 믿음을 떠난 자들에게 내리시는 마지막 통고, 그 순간 침묵하고 맙니다. 말씀이 침묵하고 권세가 침묵합니다. 세상은 조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간곡한, 아주 애절한 부탁을 하는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예.” 하고서는 안 갔다. 둘째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싫습니다.”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다. “누가 아비의 뜻을 이루었느냐?” “둘째입니다.” 예수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너희들이 내 앞에서 모른다고 했고 아니라고 했으나 뒤에라도 뉘우치고 가다오 하는 말 아닙니까? 둘째 아들처럼 후에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이 권세를 받아들여다오. 간곡한 부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왜 저 같은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까? 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유황불을 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오늘도 참으십니다. 뒤에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고, 여기에 심판이 있고, 여기에 인내의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말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면서 사람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아야 하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만왕의 왕 되심을 보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만왕의 왕 되심을 보고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빌라도 앞에 말없이 침묵하시는 침묵의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참아주시는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죽을 대신 그가 죽으시고, 내가 저주 받을 대신 그가 저주를 받으시고, 내가져야 할 십자가를 그가 지셨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바로 바라볼 때 그 속에 나의 삶의 존재가 있습니다. 나를 향한 사랑이 있고 내 존재가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멘.


 

2014/04/16 16:19 2014/04/1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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