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래전, 어느 신문에 실렸던 칼럼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어렸을 때 나이키 운동화가 미치도록 신고 싶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고 싶었는지 사람을 볼 때 딱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답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사람, 안 신은 사람. 그래서 어머니께 졸랐는데,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 그 성적 가지고 어떻게 나이키를 사달라고 하냐?” 그러시더랍니다. “그러면 공부 열심히 해서 20등 할게요. 사 주세요.” 그랬더니 어머니 말씀이 네가 20등 한다는 거 보니까... 그러면 40등은 하겠구나.” 그러셨대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20등은 못하겠더래요. 그래서 가출을 해 버렸답니다. 어느 중국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손님들에게 자장면도 나르고 그렇게 지냈답니다, 나이키 운동화 살려고. 그래 어머니가 할 수 없어 나이키 운동화를 사다 놓고 친구들을 통해 나이키 운동화 사 놨으니까 돌아오너라.”해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보니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걷고 뛰고 하면서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는데 어느 좁은 골목에서 깡패들을 만난 겁니다. “, 운동화 벗어.” , 그 나이키 신발을 뺏겨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이 교수님이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나이키보다 더 좋은 신을 신고 사는 오늘, 내가 정말 행복한가?” 이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표이자 인간 존재의 종착지는 행복이다.” 고 했습니다. 행복이 목적이요, 행복이 종착지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애쓰는 것은 결국에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을 말할 때, 일단은 동물적 행복이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배고프다가 먹을 때, 졸리다가 잘 때, 병들었다가 건강해졌을 때,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이런 것들을 동물적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 행복은 이런 것만이 아니거든요. 더 높은 것이 있어요.

양심적이고 도덕적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죄책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있다면 잠자리가 편치 않습니다. 나로 인해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깨끗하게 웃을 수 없습니다. 내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먹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적 행복이요, 도덕적 행복이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철학적 행복입니다. 지적 욕구를 채워가면서 행복을 깨닫습니다. ‘, 이것이다.’ ‘이것이구나.’하는 만큼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행복은 영적관계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는 그 어디서든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했던 그 간증 말입니다. 하늘과의 관계, 하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많은 오해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이나 여건에서 찾으려고 하는 오해입니다. 이것만 좋아지면, 이것만 좀 더 나아지면 하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그 기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환영받고 인기를 누리는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합니다마는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중국 송나라에 정희라는 학자가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했습니다. 첫째는 일찍 등과하는 것, 이거 좋은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불행한 것이랍니다. 이 사람은 교만해지고 친구가 없고 한평생 고독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너무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특별히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불행이랍니다. 너무 못 만나도 걱정이지만 너무 잘나가는 부모를 만난 자식은 자기 인생 살기 힘들다는 거지요. 그리고 셋째는 너무 재주가 많은 사람, 재능이 너무 많은 사람도 불행하다고 했어요. 사실이 그래요, 재주 많은 사람 잘 되는 거 별로 못 봤어요.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야 한 우물만 파는 거지요. 이것도 저것도 건드려보는데 나중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일찍 출세하지 못한 것, 보통 부모 만난 것, 재주 없이 태어난 것, 그거 감사할 수 없겠어요? 이 수준에 올라서야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오늘 말씀,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듣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 글을 열 번, 스무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비결이 떠오를 것입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 보여 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칭찬받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래,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사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건강을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마저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 ‘네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그 고통, 그 고난, 그거 내가 준 것이다, 내가 너에게 준 그 육체의 가시, 그것이 은혜다. 그것으로 족하다.’

 

여러분, 이 은혜, 하늘의 은혜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하늘의 은혜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을 통한 의미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기에 신앙적 겸손이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이 이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가 교만이거든요. “저 실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라는 이 계교에 휘말린 거 아닙니까. ‘하나님처럼 될까봐.’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이 교만이 결국 오늘까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유혹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십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백만 원 주셨습니다. 백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천만 원 주셨습니다. 천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일억을 주셨습니다. 일억 받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그 순간, 그 사람,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공하고 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출세하고 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계속 겸손했더라면 더 큰 것을 주셨을 겁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은혜를 받는 한계이며 은혜를 받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디까지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인간은 스스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혹여 라도 나는 겸손하다.’생각하십니까? 그게 교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겸손하다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스스로 교만하다 하는 사람은 진짜로 교만한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합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가시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오늘 이 만큼이라도 겸손해 진 겁니다. 이것이 있고야 겸손해 진 거지, 나 스스로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겸손하지 못해서, 겸손케 하려고 그 사건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병들지 않았으면 나는 교만해질 사람이다,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나는 기고만장할 사람이다, 내가 실패하지 않으면 교만해 질 사람이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 자기 고백입니까?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비로소 내가 있다는 고백 말입니다.

 

겸손함으로 은혜가 은혜 된다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겸손 수준에 있습니다. 겸손한 만큼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겸손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행복하십시다. 은혜를 은혜로 알아서, 그 은혜가 은혜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2015/07/20 16:35 2015/07/20 16:35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래전, 어느 신문에 실렸던 칼럼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어렸을 때 나이키 운동화가 미치도록 신고 싶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고 싶었는지 사람을 볼 때 딱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답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사람, 안 신은 사람. 그래서 어머니께 졸랐는데,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 그 성적 가지고 어떻게 나이키를 사달라고 하냐?” 그러시더랍니다. “그러면 공부 열심히 해서 20등 할게요. 사 주세요.” 그랬더니 어머니 말씀이 네가 20등 한다는 거 보니까... 그러면 40등은 하겠구나.” 그러셨대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20등은 못하겠더래요. 그래서 가출을 해 버렸답니다. 어느 중국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손님들에게 자장면도 나르고 그렇게 지냈답니다, 나이키 운동화 살려고. 그래 어머니가 할 수 없어 나이키 운동화를 사다 놓고 친구들을 통해 나이키 운동화 사 놨으니까 돌아오너라.”해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보니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걷고 뛰고 하면서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는데 어느 좁은 골목에서 깡패들을 만난 겁니다. “, 운동화 벗어.” , 그 나이키 신발을 뺏겨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이 교수님이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나이키보다 더 좋은 신을 신고 사는 오늘, 내가 정말 행복한가?” 이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표이자 인간 존재의 종착지는 행복이다.” 고 했습니다. 행복이 목적이요, 행복이 종착지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애쓰는 것은 결국에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을 말할 때, 일단은 동물적 행복이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배고프다가 먹을 때, 졸리다가 잘 때, 병들었다가 건강해졌을 때,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이런 것들을 동물적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 행복은 이런 것만이 아니거든요. 더 높은 것이 있어요.

양심적이고 도덕적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죄책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있다면 잠자리가 편치 않습니다. 나로 인해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깨끗하게 웃을 수 없습니다. 내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먹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적 행복이요, 도덕적 행복이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철학적 행복입니다. 지적 욕구를 채워가면서 행복을 깨닫습니다. ‘, 이것이다.’ ‘이것이구나.’하는 만큼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행복은 영적관계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는 그 어디서든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했던 그 간증 말입니다. 하늘과의 관계, 하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많은 오해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이나 여건에서 찾으려고 하는 오해입니다. 이것만 좋아지면, 이것만 좀 더 나아지면 하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그 기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환영받고 인기를 누리는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합니다마는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중국 송나라에 정희라는 학자가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했습니다. 첫째는 일찍 등과하는 것, 이거 좋은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불행한 것이랍니다. 이 사람은 교만해지고 친구가 없고 한평생 고독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너무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특별히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불행이랍니다. 너무 못 만나도 걱정이지만 너무 잘나가는 부모를 만난 자식은 자기 인생 살기 힘들다는 거지요. 그리고 셋째는 너무 재주가 많은 사람, 재능이 너무 많은 사람도 불행하다고 했어요. 사실이 그래요, 재주 많은 사람 잘 되는 거 별로 못 봤어요.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야 한 우물만 파는 거지요. 이것도 저것도 건드려보는데 나중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일찍 출세하지 못한 것, 보통 부모 만난 것, 재주 없이 태어난 것, 그거 감사할 수 없겠어요? 이 수준에 올라서야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오늘 말씀,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듣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 글을 열 번, 스무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비결이 떠오를 것입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 보여 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칭찬받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래,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사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건강을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마저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 ‘네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그 고통, 그 고난, 그거 내가 준 것이다, 내가 너에게 준 그 육체의 가시, 그것이 은혜다. 그것으로 족하다.’

 

여러분, 이 은혜, 하늘의 은혜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하늘의 은혜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을 통한 의미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기에 신앙적 겸손이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이 이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가 교만이거든요. “저 실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라는 이 계교에 휘말린 거 아닙니까. ‘하나님처럼 될까봐.’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이 교만이 결국 오늘까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유혹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십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백만 원 주셨습니다. 백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천만 원 주셨습니다. 천만 원 받고 겸손했더니 일억을 주셨습니다. 일억 받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그 순간, 그 사람,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공하고 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출세하고 자만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계속 겸손했더라면 더 큰 것을 주셨을 겁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은혜를 받는 한계이며 은혜를 받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디까지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인간은 스스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혹여 라도 나는 겸손하다.’생각하십니까? 그게 교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겸손하다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스스로 교만하다 하는 사람은 진짜로 교만한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합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가시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오늘 이 만큼이라도 겸손해 진 겁니다. 이것이 있고야 겸손해 진 거지, 나 스스로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겸손하지 못해서, 겸손케 하려고 그 사건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병들지 않았으면 나는 교만해질 사람이다,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나는 기고만장할 사람이다, 내가 실패하지 않으면 교만해 질 사람이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 자기 고백입니까?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비로소 내가 있다는 고백 말입니다.

 

겸손함으로 은혜가 은혜 된다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겸손 수준에 있습니다. 겸손한 만큼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겸손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15/06/08 10:27 2015/06/0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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