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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웃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있고, 같은 맥락에서 행복 바이러스란 말도 있죠, 실제 과학적으로 이런 현상이 규명됐는데, 웃음이 어떻게 전염되는지 남주현 기자가 설명합니다.

<기자>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한 남성이 무언가를 보며 웃기 시작합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피식 피식 웃더니 급기야 소리를 내며 웃습니다.

웃음이 전염된다는 데 착안해 한 음료수 제조업체가 만든 광고 영상입니다.

웃음소리를 직접 듣지 않더라도, 영상을 보면서 함께 웃기도 합니다.

[김소현·장지희 : 한 명이 웃으면 그냥 다 같이 웃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우리 뇌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 거울 뉴런을 통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 하거나 공감하게 됩니다.

이 같은 현상은 긍정적인 상황에서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런던대 연구팀이 기능 MRI로 뇌를 촬영해봤더니, 부정적 감정보다 즐거움 같은 긍정적 감정을 접했을 때, 그리고 소리가 클수록 거울 뉴런이 더 활성화됐습니다.

[남궁기/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웃음 같은 것이야말로 긍정적인 기분이고 강한 자극이 되기 때문에, 같이 즐거운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되고요.]

함께 웃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는 '거울 효과'는 사람을 비롯한 영장류에서 볼 수 있는데, 인류가 기술을 익히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상취재 : 정상보, 영상편집 : 김진원, VJ : 신소영)
출처 : SBS 뉴스 /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17017&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015/10/16 10:50 2015/10/16 10:50

유진 피터슨의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훈련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초점연습이다.”고 했습니다. ‘focal practice. 초점 연습.’ 어떤 사건이든지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하늘을 생각하느냐 땅을 생각하느냐, 나를 생각하느냐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이웃을 생각하느냐, 과거를 생각하느냐 미래를 생각하느냐, 생각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집중을 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에 초점을 맞추어야지요. 이건 훈련입니다. 언제나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훈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초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서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이야기를 공부할 때는 그 초점이 탕자가 아니라 탕자의 아버지라는 초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오래 기다리심, 나를 기다리시며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 중에 생겨진 굉장한 사건입니다.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이겁니다. “(13),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여기에 생각을 맞추라는 겁니다. 앞에는 홍해, 물에 빠져 죽겠고, 뒤에는 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죽겠고, 옆에는 광야에서 뜨거워서 죽겠고……. 이 와중에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초점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라, 이 진퇴양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그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라,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며 초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연습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건강을 잃었어도 믿음을 얻었어요. 믿음에 초점을 둔 사람은 건강 잃은 것이 오히려 은혜라고 간증하거든요. 바울 사도의 육체 가시 사건을 통한 간증이 이거잖아요. 건강 잃은 것, 이대로가 은혜라는 것이지요. 재산을 잃었어도 진실함을 얻었다면 그것 역시 은혜요 감사입니다. 재산을 잃었지만 겸손을 얻었고, 손해를 보았지만 명예를 얻었어요.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여기서 손익계산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은혜로 주신 선물, 이 사건을 통해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손길, 여기다 초점을 맞추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새로운 해답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방법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사안일을 원하지마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을까? 그냥, 한 번에, 단 번에 바로의 마음을 확 바꾸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면 될 걸, 왜 그렇게 복잡하고, 시간을 길게 끄는 것일까?

바로 왕이 악독한 왕이었다고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열 가지 재앙을 보고도 하나님께 대들었던 바로가 악독한 사람이었다고요?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보다 더 했으면 했지 절대로 모자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왕이나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 열 가지 재앙을 똑같이 보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가 보지 못했던 엄청난 기적까지도 본 사람들입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도 보고 있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그걸 마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경험하고 있어요. 매일, 매 순간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지 못해요. 바로 왕 욕할 거 없어요.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그 은혜 속에 있건만, 아직도 불평이요 원망이더란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없어요.

 

왜 홍해 길로 인도 하셨느냐 고요? 이 불신앙을 가르쳐야겠어요. 연습시켜야 되겠어요.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깜짝 놀랄 일을 통해서 초점 연습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신앙 연습, 믿음 연습,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연습 말입니다. 아니, 이 연습 자체가 은혜이지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거니까.

 

오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을 가져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가만히 서서 이 사건의 초점을 생각하라. 이 사건의 중심에 서서, 이 사건의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생각하라, 초점을 생각하라, 이 사건의 뜻이 무엇일까를.

 

왜 홍해로 인도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을 들어라.’ 출애굽기 1317-18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블레셋 사람을 만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할 것이다, 그러니 ‘No return!’ 돌아가지 못하게, 돌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홍해를 여셔서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시고, 그리고 홍해를 닫으셨습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대단한 상징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열어주시고, 그리고 닫으셨습니다. 엄청난 사건, 엄청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평생 잊지 못할 간증거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능력, 조용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 들을 수 있는 믿음과 신앙의 귀를 요구하십니다. 듣고 나면 보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확증될 때,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창조적인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간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015/01/22 15:52 2015/01/22 15:52

18:14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5:1-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가 히틀러를 반대하다가 옥에 갇혀서 35세의 나이에 순교를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이 편지들이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는데 이를 옥중 서신이라 합니다.

히틀러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때, 본 회퍼라는 젊은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외칩니다. “어느 미친 버스 운전사가 만취 상태에서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치면서 차를 몰아가고 있는데, 만약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뛰어다니면서 그 차에 부상을 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루어 주며, 또 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이렇게만 한다고 해서 되겠느냐? 기독교인이라면, 아니 누구든지 그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되지 않겠느냐?” 아주 패기 있는 설교가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본 회퍼가 순교당하기 직전에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더랍니다. 히틀러가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더래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를 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피를 흘렸으니 너는 지옥으로 가라!” 그랬더니 히틀러가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죽어서 이런 세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구 하나 내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내게 그렇게 전도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항변을 하더랍니다. 본 회퍼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답니다. “주님, 저는 저 사람을 끌어 내릴 생각만 했지, 저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잘못이요 제 허물입니다.”하고 회개했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학적으로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주 비유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혁명신학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0년도에는 도시산업선교로, 80년도에는 민중신학으로 발전되면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 사회주의적 기독교가 만연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래, 히틀러를 위해 기도해 봤냐?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봤냐? 인간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것이 복음주의입니다.

 

오늘 본문의 잃은 양 비유는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갖은 고생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가시는,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적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피할 수 없는 시빗거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두고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자가 없는 사이 짐승들이 달려들면 그 아흔 아홉 마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차라리 한 마리 잃는 것이 났지 그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를 잃어서야 되겠느냐?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거, 충분히 시비를 걸만도 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난센스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지금 내 앞에 하나의 금시계가 있고, 한 줌의 콩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거 물어 보나마나한 질문을 왜 하느냐고요? 그런데 상황을 바꿔놓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무인도입니다. 나 혼자만 살고 있는 무인도라고 합시다. 그때도 내 앞에 하나의 금시계와 한줌의 콩이 있다면... 이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는 당연히 콩입니다. 콩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콩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법칙에서 본다면 당연히 금시계이지요. 그러나 생명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줌의 콩이어야 합니다. 경제적 가치에서 본다면 아흔 아홉 마리가 더 가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서를 대할 때 경제적 시각으로 보는 한, 성서는 침묵하고 맙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 “까짓것 그 한 마리쯤이야해 버린다면 성서는 침묵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경제적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봅시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그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가 당신이라면, 그 한 마리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경제 운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 한 명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크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목자는 생각합니다. “저 한 마리가 아차 잘못하면 죽고 말겠구나. 어디선가 맹수에게 찢겨죽지는 않을지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바로 그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행위, 찾아나서는 겁니다.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목자가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은 자기발로 찾아오지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순하기는 하지만 멍청한 동물입니다. 갔던 길을 돌아오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의 생각에는 내가 저에게 가지 않으면 저는 내게로 올 수가 없다. 내가 가서 도우지 않으면 저 양은 죽고 말 것이다.’ 이는 결정적인 사건이요 보나마나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요, 그 행동적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목자는 저를 원망하거나 심판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한 마음, 초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맵니다. 오늘 말씀을 새번역 성서에서 보시면 찾을 때까지 찾지 아니하겠느냐?” ‘찾을 때까지 찾지 않겠느냐.’ 기어이 찾겠다는 강한 의지, 반드시 찾겠다는 강한 의지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다가 찾았을 때 그는 너무도 기쁘고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크게 기뻐하면 잔치를 벌였다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또 하나의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시빗거리입니다. 이 한 마리를 찾은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으니 그 잔치 때문에 몇 마리의 양이 죽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잔치를 벌이면 술을 빚고 떡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은 양고기입니다. 자기가 멍청해서 길을 잃은 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몇 마리가 죽었을지 모를 일이란 말입니다. 이게 만만치 않은 시빗거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빗거리를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될까요? 여러분은 혹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건강 감사헌금은 건강할 때 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건강할 때 감사헌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병원에 입원을 해서 큰 고생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건강 감사헌금을 하더란 말입니다. 병원비도 어렵게 구해서 낸 판국에 감사헌금까지 하더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건 경제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거든요. 돈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는데 여기에 무슨 타산이 필요하겠습니까? 따지고 계산할 것 없습니다. 오로지 감격,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 없어져도 좋다, 나는 나대로 즐겁다. 이 정도의 감격이라면 정말 멋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이러한 경험을 한번쯤은 맛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 큰 병에 걸려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이제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다 주어도 좋다. 다 바쳐도 좋다.”하는 이런 즐거움, 이런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타산적이거나 이기적인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즐거워하는 이 마음, 이 기쁨, 이것이 목자의 기쁨이요 오늘 본문의 목자의 감격이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이심을 비유해주고 계십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불쌍한 인간들이 언제쯤이면 깨우치고 돌아올까 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찾아 가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지극히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1:1의 관계에서, 나 하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나를 살리려하시다가, 나를 살리시려 자기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고로 십자가는 나를 살리신 표적이며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중보의 흔적입니다.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너 왜 이랬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것을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구원을 해 놓고 볼 일입니다. 우선 속량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찾으십니다. 이 아침에 말입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이 말씀을 통해서, 이름 없는 한 전도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아무개야하고 부르시며 찾으십니다. 찾으셔서, 찾은 것만으로 너무나 기쁩니다. 그러니 책망도, 훈계도,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의롭다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의롭다하시는 사랑으로 의롭지 못한 양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양은 감히 주인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덮음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덮어 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 감격할 뿐입니다. 아멘.


2014/07/25 09:06 2014/07/25 09:06
 

제목: 가장 고상한 것

성경: 빌립보서 3:1-9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몇 년 전부터 이상기후를 말하면서 “봄이 없어졌다”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번 봄은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봄 없이 여름으로 곧장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 때 쯤이면 산으로 들로 꽃구경도 다니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는 참 어려운 절기입니다. 지금,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시작하여 40일 전부터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모든 생활을 절제하며 지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2014년 부활절은 4월 20일이니까 지금 우리는 ‘사순절’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으며 하늘 바람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스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회학자들이 ‘인간의 성장과정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이렇게 분류해놓고 있습니다. 먼저는 유아기인데, 이때는 어머니이면 그만이랍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 입으로는 젖을 빨고 손으로는 다른 한쪽의 젖무덤을 만지고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는 시기랍니다. 그리고 유년기로 접어들면서는 장난감이 최고랍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장난감 가지고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답니다. “일찍 일어나라,” “세수해라,” “머리 빗어라,” 연신 잔소리를 합니다마는 여학생 한 명만 나타나면, 게임 끝입니다. 좋아하는 남학생 한명만 나타면 더 이상 잔소리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청년기가 되면 지식에 목말라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려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려 합니다. 동시에 이 목마름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답니다. 40대가 되면 사업을 원한답니다. 꼭 사업뿐만이 아니라 온 생애를 걸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욕망이 커진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 또한 채울 수 없는 공허와 후회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답니다. 50대로 접어들면 명예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데, 그래서 무슨 의원이다, 위원이다 하는 사람들보면 50대의 사람들이 많답니다. 이들은 일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의 명예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예를 얻기 위해서 많은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60대가 되면 여러모로 한계를 느낀답니다. 힘도 부딪치고, 기력도 떨어지고,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먹는 일에만 관심이 갑니다.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회학자들이 바라본 ‘인간성장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다른 것 필요 없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모두가 상대적인 것들 이었습니다. 변하는 것,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절대적인 것처럼, 이것이 전부인양 착각했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좀 건방진 표현 하나 할까요? 사실, 인생이 그런겁니다. 내 인생이 그렇습니다. 딴에는 이거야말로 우아한 것이며 품위 있는 것이라고, 이거야 말로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큰 소리쳐 왔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질없었다 싶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피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피곤하고, 왜 이렇게 허무한 것입니까? 그래,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혹, 말입니다. 지탱할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까? 내가 기댈 수 있는, 나를 지지해 주며 나를 품어 줄 수 있는, 내 인생을 걸만한 절대적 가치의 그 무엇을 찾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아니, 더 정직히 말해서 가치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 때문에 스스로를 가면화시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면 속에 감추어진 내 얼굴을 나는 알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왜 그렇게 피곤해하며 허무해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시는 한 마디는 이런 겁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은 절대적 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기분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나, 이대로 죽어 좋다. 아니,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의 극치는 없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싶은 감정의 극치, 희열, 정점을 경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죄송하지만 없었다면 참 재미없는 인생 사신거구요, 있었다면 그 시간에 그대로 죽었어야 돼요. 이거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웃기는 이야기만은 아니거든요.


마태복음 13:44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남의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주인도 알지 못하는 노다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사람,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사고, 마침내 그 보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맙니다. 또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마침내 가장 훌륭한, 절대적 가치의 진주를 발견하고, 그 진주를 자기의 것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모아온 자기의 진주들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절대적 가치,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것을 ‘가장 고상한 것’ ‘excellency’, ‘the best’입니다. 가장 귀한 것, 탁월한 것,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함입니다. 이 고상한 것,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 나니 전에 좋아하던 것, 유익하게 여기던 것이 다 시시해져서 그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상실한 것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 잘라버렸고, 내 스스로 내던져버렸습니다. 내 결단이었습니다. 너무도 좋은 것을 얻었기에, 절대적 가치를 발견하였기에 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고 나서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것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 남 주고 맙니다. 배설물로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해로 여겼다고 합니다.

내 가문이나 명예들로 인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내 못된 습성이나 버릇으로 인해 내가 거룩해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겸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버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 진실하기 위해, 겸손하기 위해서 배설물처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깨끗이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거듭나고 나서 자기가 그토록 아꼈던 다이아반지, 목걸이, 팔찌 등을 내 놓으면서 “좋은 일에 써 달라”합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이것들이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 구석에 쳐 박아 두었는데, 그런데 이게 가끔씩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좋은 일에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놓은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순간부터 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울까’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내가 발견되어 지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진 나! 십자가 안에서 발견되어 진 나,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자랑이요, 그리스도만이 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행복이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가는 것, 이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에서 매사에 흑자냐 적자냐를 따지고 살아갑니다.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지면서 살아갑니다마는, 어떠한 손해를 지불해서라도 예수님을 얻었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어떠한 적자를 지불해서라도 더 큰 흑자를 얻었으면 그것은 잃은 것이 아닙니다. 좀 손해를 보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을 얻었고, 십자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선택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좀 더 큰 것, 좀 더 귀한 것, 좀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얻었기에 그밖에 것을 미련 없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살고,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여기에 ‘잘 했다’ ‘옳은 선택을 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못에 사는 물고들에게는 그 연못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려다보기에 그 연못은 참 보잘 것 없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하는 이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합니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성서를 읽으십시오. 사건 하나하나를 통하여 내 삶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힘을 경험하십시오. 무엇보다 소중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나를 발견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고 결단하게 하시는 하늘 바람이 예배하는 교직원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리고 우리 강남세브란스병원 골목마다, 구석마다 스며들어서 사건 사건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결심과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2014/04/04 14:05 2014/04/0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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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13:13 2014/03/25 13:13

화가를 꿈꾸던 사람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그려서

어른들에게 보여 주며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어른들은

모자가 왜 무섭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그는 화가가 되는 꿈을 접고 조종사가 되어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사하라 사막에 떨어졌다.

거기서 만난 어린아이가 양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는 구멍 뚫린 상자 하나를 그려 주자 매우 만족해했다.

아이는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양을 보았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다.  


어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사물을 보지만

어린아이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그림은 솔직하다. 자기와 가장

가까이 그려진 사람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가장 크게

그리는지를 보면 아이의 생각과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또 알려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이 노력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왜냐면, 사람에게는 이미 무엇을 순수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인간에게 보여 주시고 나타나

주시는데 그것을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특별계시로

성서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고 일반계시는 모든 자연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서를 통해, 또 거짓 없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 볼 때 가장 잘 보인다.

이 가을을 아름답게 느끼는 그 감동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연은 펼쳐놓은 성서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을 동산으로 나아갈까?

2014/02/14 16:27 2014/02/14 16:27

떨어지는 낙엽조차도 내겐 이렇게 아름다운데 암 재발 통보받은
그의 심정은 어떨지… 지금은 낙담하겠지만 내년 가을에는 행복할 것

요즘 출근길이 아주 즐겁습니다. 서울 혜화동 집에서 광화문사거리 근처에 있는 회사까지 40~50분 정도 걸으면서 늦가을 정취를 제대로 맛보고 있습니다. 샛노란 은행잎이 눈처럼 쌓인 보도를 걸으며 흘러간 유행가를 불러봅니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 다시 떠오르나~.' 30여년 전의 유행가 '가을비 우산 속에'(최헌) 노랫말이 쏙쏙 가슴에 와 닿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은행잎을 한 움큼 집어 허공에 뿌리면서 큰 소리로 웃어 보기도 합니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아침 출근길엔 행인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국화 전시회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노랑·빨강·보라·주황 등 10여가지 색깔의 수만 송이 국화가 내뿜는 향기 덕분에 오감(五感)이 행복했고 마음이 풍요로웠습니다

중략

어제 아침 잎사귀가 거의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쳐다보며 "아~ 참 좋다" 하고 탄성을 터뜨리다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얼굴은 본 적이 없고 이메일로만 안부를 주고받는 30대의 암환우(患友)입니다. 흉선암으로 투병 중인 그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은 지 7개월 만에 재발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 알려왔습니다. 제 칼럼을 읽으며 힘을 얻고 있다던 그의 재발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치료를 시작한 그의 각오는 이랬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두 번씩 재발하는데 나라고 용빼는 재주 있겠나 싶습니다. 지나고 보니 할 만하기도 했고, 외려 행복했던 기억도 많았고, 다시 한번 힘내서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닥친 시련을 담담하게 헤쳐나가려는 그를 위해 두손 모아 기도하면서도 3년 전의 제 모습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가을을 예찬해도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은 좌절과 절망의 계절이기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를 위해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입니다. 3년 전 투병 중 가장 힘들었을 때 고교 동창이 휴대전화 문자로 찍어 보내준 문구입니다. 친구는 "매일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된다. 비바람은 거세고 귀찮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새싹이 돋는다"며 제게 힘을 줬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대인의 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의 '다윗왕의 반지'에 나옵니다. 다윗왕이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을 불러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게 하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세공인은 반지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솔로몬 왕자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새기라고 알려줬다고 합니다.

2011년 가을이 그에게는 절망의 계절이겠지만 결국엔 지나가겠지요. 그리고 내년 이맘때 쯤이면 그는 행복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년 전 저와 지금의 제가 다른 것처럼요. 그런 믿음과 희망을 품고 있다면 이번 가을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의 쓸쓸함을 외면하지 말고 그냥 감정 그대로 받아들여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울고 싶다면 실컷 울어도 괜찮을 듯싶네요. 가을에는 이별과 슬픔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많은 걸 보면 슬퍼해야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명상 전문가는 "때론 눈물도 흘려야 웃음의 효과가 더욱 커진다"면서 눈물과 웃음의 건강학을 강조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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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08:48 2011/11/1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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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을 여는 기도 ’    - 민진희-

 

오늘 하루, 제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미소로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저의 언어에 향기가 있게 하시고

저의 행동에 겸손이 있게 하시고

저의 가치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시오

 

저의 마음 깊은 곳에 사람을 향한 이해와

따뜻한 동정의 마음을 주셔서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게 하시고

받으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받은 것은 기억하고

준 것은 곧 잊어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하루, 목마른 이에게

샘물 한잔의 위로를 줄 수 있게 하시며

마음이 상한 자를 스쳐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소망을 잃은 이에게 소망을 갖게 하시며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게 하소서

 

제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 바라보는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이 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찬미가

들꽃의 향기처럼 세상으로 가득 퍼져 가게 하시고

오늘 하루, 저의 마음으로

행동으로, 언어로, 그려진 그림들이

잠드는 시간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당신께 드려질 수 있도록

종일토록 도우심을 간구합니다아멘

2011/04/18 08:26 2011/04/18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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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09:48 2011/02/14 09:48

한국가구박물관에 다녀와서


                                                                                           박효진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안이 깊어 닿는 데가 없는 바하의 음악처럼, 지난 주말 다녀온 한국가구 박물관은 생각할수록 그 곳에서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나고, 그 느낌을 제대로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담스럽기도 하다. 몹시도 추웠던 겨울 주말 오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찾아가지도 못할 성북동 고갯길을 구불구불 돌아, 널찍한 주차장에 주차를 한다. 목조 대문에 들어서서,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이리 오너라~!”라고 외치기도 전에, 어느 새 큐레이터가 반갑게 맞이 한다. 대기실겸 다실로 사용하는 궁채에서 투어는 시작된다. 앞마당에 흰 눈 덮힌 흙들이 얼기와 녹기를 거듭한 14년동안 수많은 기둥과 기와를 옮겨와 한옥 열채를 재건축하면서 흘렸던 집주인의 땀과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안방, 사랑방은 서서 지나가며 스치는 곳이 아닌지라, 앉아서 눈높이를 맞추고, 창가에 들어 앉은 문갑에 팔을 기대어 바깥을 내다 본다. 창문을 열면, 남산 언덕의 완만한 능선이 맑은 하늘을 가로 지르며, 평온한 느낌으로 가득 들어온다. 그 느낌은 밤낮으로, 계절에 따라 달라질 것을 생각하니, 설계자의 세심한 배려가 경외스럽기만 하다.

 

청산유수 설명도 잘 하는, 착하게 생긴 큐레이터를 따라 내이와도 같은 복잡하고 좁은 통로를 따라가니, 방 하나하나 의미가 있고 새롭다. 출구는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입구라는 것처럼, 낯 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함, , , 반닫이, 서안, 소반, 약장, 그리고 뒤주 등 500여점의 다양한 종류의 가구들을 만나니, 다음 코너를 향한 통로를 지나는 짧은 순간에도 기대감과 호기심이 생긴다.

 

유리창에 갇힌 가구가 아니라, 제 위치에 자리 잡은 가구들은, 먹감나무, 단풍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소나무 등 각종의 재질에 따라, 세월의 때를 입고,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나이테 무늬로 영원한 존재감으로 다가선다. 중국이나 서양 가구처럼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문양의 절제된 아름다움과 함께 편안하고 안정감을 준다. 가구의 직선은 딱딱하지도 않고, 나비 모양한 경첩의 곡선은 가볍지도 않다.

 

옛글에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란 말이 있듯, 다양한 가구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우리 옛가구는 아직까지 살아있고, 숨쉬는 생명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2011/01/24 15:00 2011/01/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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