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기적

  
뇌전증 연구와 치료의 새 길 여는 김흥동 교수
뇌 속의 뒤엉킨 회로를 풀어주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뀝니다

뇌전증 환자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노벨, 헨델, 고흐, 잔다르크와 같은 위인들이 모두 뇌전증 환자였다고 하니까요. 국내만 따져도 이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40만 명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사회적인 시선은 차갑기만 합니다. 발작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 탓에 환자를 기피인물로 여기죠. ‘간질’이란 이름을 버리고 ‘뇌전증’이란 용어를 쓰는건 그런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첫 단계입니다.
에디터 최종훈 | 포토그래퍼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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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었는데도 마치 어제 만난 듯했다. 신기했다. 하루에 만나는 환자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는 소문난 의사가 3년 전에 단 한 번 봤을 뿐인 이편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내용까지 얼추 기억해내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그동안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보였다. 하얀 머리칼과 아이 같은 미소, 부드러운 말투 속에 문득문득 드러나는 쇠심줄 같은 의지, 외과의사가 아니면서도 수술적 치료법을 찾아온 이력까지 온갖 이질적인 요소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느낌도 여전했다.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퍼즐을 받아든 것처럼 빨리 아귀를 맞춰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Q 어린 환자와 부모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아이돌 스타 못지않으시더군요. 하지만 문외한으로서는
병명이 몹시 낯섭니다. 뇌전증도 그렇고 LGS도 그렇고.
뇌세포들은 끊임없이 전기적인 신호들을 주고받으면서 신체의 기능과 작용을 조절해갑니다. 그런데 그 회로에 문제가 생기면 감각이나 의식, 운동에 이상이 나타납니다. 갑자기 고개가 툭 꺾어지거나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경미한 수준부터 의식을 잃고 온몸을 떠는 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을 보이게 되는 거죠. 그걸 뇌전증이라고 부릅니다. 뇌손상이나 뇌졸중 같은 질환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현재로서는 유전에 혐의를 두기도 어렵고요. 뇌전증에는 특히 어린아이들의 인지기능을 급속하게 떨어트리는 부류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LGS(레녹스-가스토 증후군, Lennox-Gastaut Syndrome)입니다. 불현듯 찾아온 발작이 나날이 잦아지면서 총기가 사라지고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심각한 지적장애로 이어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Q 듣고 보니 ‘간질’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제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단어에 담긴 이미지가 환자들에게 가당치 않은 낙인을 찍기 때문입니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게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발작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 탓에 환자를 기피인물로 여기는 겁니다. ‘간질’이란 이름을 버리고 ‘뇌전증’이란 용어를 쓰는 건 그런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첫 단계입니다. 지난해 6월 대한뇌전증학회 주관으로 세계적인 권위자들을 초빙해 개명선포식까지 가졌습니다만, 아직은 갈 길이 먼 형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 환자들을 따돌리는 경향이 심해진다는 점을 감안해 그맘때에 새로운 이름으로 다른 의식을 심어주려노력하고 있습니다.

Q 뇌전증이 희귀질환이라 사회적으로 관심이 적은 게 아닐까요?
환자가 아주 적을 것 같은가요? 실제로는 생각보다 흔한 편입니다. 국내만 따져도 이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40만 명을 헤아립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어린아이와 노인들은 아픔을 호소할 능력이 없고 젊은이들은 사회적인 편견 탓에 스스로 나서지 않을 따름입니다.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관심을 받지 못하고, 전반적인 인식이 떨어지니 지원도 변변히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루게릭 병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파킨슨 병에 비해 열 배, 스무 배 이상으로 환자가 많고 이들이 받고 있는 고통도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연구와 치료에 투입되는 국가적인 지원이나 관심은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Q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겠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는 묘책은 없습니까?
모든 질병이 다 그렇지만 최대한 빨리 발견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는 게 으뜸입니다. 어린이 뇌전증은 증상이 심하면 도리어 예후가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LGS는 증상이 극적이지 않아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상황과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되풀이하면 병원을 찾는 게 좋습니다. 진단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장되거나 부족하게 진단될 위험이 있고 다른 병으로 오인할 수도 있어 가능한 한 전문가를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웬만한 핸드폰에 다 있는 동영상 촬영 기능을 활용해 아이의 증세를 찍어서 가져오면 진단에 큰 도움이 됩니다.

Q 치료법이 없는 건 아니겠죠? 교수님이 도입한 케톤생성식이요법으로 큰 효과를 봤다는 경험담이 적지 않던데요.
예전에는 약 먹고 지켜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약물의 효능도 획기적으로 좋아졌고 치료법도 식이요법에서 수술까지 다양해졌습니다. 덕분에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료율이 높아졌습니다. 케톤생성식이요법은 주로 난치성 뇌전증을 가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법입니다. 당분을 완전히 끊고 일정 기간 동안 저단백, 저탄수화물, 고지방 음식을 집중적으로 섭취하게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입원한 상태에서 식이요법을 시작하고 보호자들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높아 발작이 극적으로 가라앉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미 수많은 환자들이 이 치료법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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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심지어 수술로 치료할 길을 여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외과의사가 아닌 교수님이 수술을 하신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제거해주는 방법입니다. 약물이 잘 듣지 않고 발작이 잦아 신경 발달이 더디고, 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범위가 아주 좁을 때 시행합니다. 수술은 당연히 신경외과 선생님들이 하십니다. 증상을 일으키는 부분을 최대한 정확하게 짚어서 알려드리는 게 제 역할이고요. 수술적인 치료법을 개발해 처음 학계에 보고했을 때에는 다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어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필라델피아 소아병원에도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치열한 논란이 있었어요. 냉소적인 시각으로 보는 의사들이 LGS인 건 확실하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Q 결국은 환자 사례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수술로 회복된 사례가 있습니까?
예닐곱 살 때 발병해 10년 정도 앓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는데 점점 인지기능이 떨어져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에는 지능지수가 50 정도로 떨어졌어요.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지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찾았습니다. 수술을 받는다고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현재까지 수술 후 70-80% 정도의 아이들이 발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지금은 여러 병원에서 수술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연간 수술 건수가 10건을 넘는 병원이 많지 않은 데 비해,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은 작년 한 해에만 약 110명을 수술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뇌전증 수술 환자의 80% 이상이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은 수술 연령을 가급적 낮춰인지 기능을 최대한 보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어서 인지기능을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조처를 취하려는 거죠.

Q 가만 두면 인지기능이 완전히 망가질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면, 그건 기적 아닌가요?
물론이죠. 더 놀라운 일들도 많습니다. 지적장애로 이어지는 뇌전증을 가진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권하는 대로 이런 처방, 저런 약을 먹여가며 세월을 보내다가 23개월 무렵에야 병원에 왔어요. 적잖은 시간이 흐른 까닭에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수시로 발작을 일으킬 만큼 황폐해진 상태였지요. 케톤생성식이요법을 적용했는데, 하루에 백번 이상 일어나던 발작이 한 달 만에 완전히 사라졌어요. 인지기능도 조금씩 나아져서 할머니의 전화에 반응을 보이더니 지금은 초등학교에 입학해 별 탈 없이 학교를 잘 다니고 있지요.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나요?
2013/02/12 14:37 2013/02/1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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