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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아이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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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끼리 모이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요즘 애들 참 무섭다’라는 말이다. 다 큰 어른들이 설마 조그마한 애들이 정말로 무서워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은 자기표현이 확실한 어린 세대들을 마주하며 이질감을 느낀다. 어쩌면 ‘요즘 애들 무섭다’라는 말 속에 담긴 것은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편견과 불신에 가깝지 않을까?
황미연([문제적 주인공만 오세요, 소설 심리치료실] 저자)


오늘의 아이들은 곧 우리 자신이다
시대의 변화는 때때로 세대를 나눈다. 예전에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다음 사람을 위해 공중전화의 잔액을 반환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낭만이 당연했지만 요즘에는 와이파이만 터지면 동전이 없어도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구시대의 낭만을 시시하다고 말하고 어른들은 디지털 세상의 아이들에게 정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접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 역시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질서와 규칙에 뜻 모를 반항심이 일고 어른의 통제에 반발심이 들었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왔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그들이다. 달라진 것은 시대일 뿐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한 것처럼 수단과 도구가 바뀌고 생활 양식이 진화한 것뿐 우리는 서로의 과거나 미래이다.
우리 역시 우리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을 겪어보지 않았던가? 아이들을 낯선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대의 대표자로서 존중해 줄 필요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알아가야 할까? 직장이나 가정에서 아이들을 접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당장에라도 관찰을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신인류를 연구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문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본 우리 아이들
아니다. 우리는 청소년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 대표적인 성장 소설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는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는 ‘아버지의 세계’와 자유와 쾌락이 보장되나 타락의 위험이 있는 ‘외부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그러다 결국은 자기 내면으로 파고들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불량 청소년 알렉스가 교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작품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폭력성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강요된 선(善) 중에서 어떤 것이 더욱 중요한 가치인지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필자는 저서 [문제적 주인공만 오세요, 소설 심리치료실]에서 싱클레어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자기 내면의 세계로 몰입하는 ‘분열성 성격’으로, 알렉스는 초자아가 결핍되어 규칙과 질서를 파괴하는 ‘반사회성 성격’으로 분류한 바 있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들도 결국은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므로 실재하는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기에 심리학적 접근이 가능했다. 이처럼 문학 작품은 인간의 삶을 토대로 지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미숙한 청소년일지라도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신의 자아를 찾아간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 역시 인간 의지의 자율성이라는 문제에 스스로 답을 내리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처럼 청소년 역시 자기 생각과 의지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태엽 달린 오렌지’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아를 가진 청소년들을 미리 ‘어떤 것’으로 규정짓는 태도 또한 삼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작품을 더 살펴보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바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라는 소설이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섯째 아이]라는 소설은 완벽해 보이는 가정에 조금 ‘다른’ 아이가 태어나면서 한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부부인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에 벗어나는 사람을 무시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남편인 데이비드는 건축 회사의 설계자로 일하고 아내 해리엇은 구매조달부서에 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의 직업처럼 자신들만의 왕국을 설계했고 자신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아이들을 조달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지극히 이중적인 사람들이다. 아이들로 넘쳐나는 집을 꿈꾸며 형편에 맞지도 않는 저택을 덜컥 계약하고 반복되는 출산과 육아로 괴로워하면서도 줄줄이 아이를 낳아 부모님에게 신세를 진다.
이러한 이중성은 해리엇의 조카 ‘에이미’ 앞에서 정점을 찍는다.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에이미를 몽골 아이라고 지칭하며 혐오하는 것도 모자라 부모의 불화로 인해 그런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라 단정 짓기까지 한다. 결국 이러한 오만함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까? 해리엇은 다섯째 아이 ‘벤’을 갖게 되면서 점점 불행해진다.
벤은 외모가 조금 특이하고 사납긴 했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리엇은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괴물처럼 힘이 세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혐오한다.
사실 해리엇에게 아이들은 그저 자신을 ‘전통을 따르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줄 자존감 유지 수단이자 자신이 설계한 행복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에 불과했다. 그런데 보통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벤이 태어나자 자신의 완벽한 행복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두려워한다. 해리엇의 벤에 대한 혐오감은 가족 전체로 퍼지고 결국 벤은 보호 시설로 내몰린다. 그러나 막상 일이 그렇게 되자 그녀는 제 발로 찾아가 그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해리엇에게 벤은 절대로 인정하기 싫은 결점이자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은 소설 그 어디에도 벤의 정확한 병명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장애가 있는 에이미는 이혼하려던 부모를 재결합하게 만들고 친척들에게 항상 사랑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벤은 어디가 잘못된 지도 모른 채 해리엇이 규정하는 대로 ‘비정상’ 취급을 받게 되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이 된다.
벤이 소속감을 느꼈던 것은 오직 자신과 같이 ‘비정상’ 취급을 받는 무리에 섞여 그 집단 안에서 ‘보통’ 사람이 될 때뿐이었다. 가장 안전을 느껴야 할 가정에서 찾지 못했던 행복을 비행 청소년 무리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니 너무나도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다섯째 아이를 위한 변주곡
매번 ‘그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해리엇은 강박적으로 완전한 행복을 이루려 애쓴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 전통적 기준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했던 그녀는 난데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벤의 탄생은 그토록 자부했던 완벽한 가정의 몰락을 의미했다. 온 가족이 떠나버린 저택에 홀로 남은 해리엇은 거대한 식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족들의 손길로 매끄러워진 나무 식탁(한때는 항상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은 현실을 더욱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행의 근원을 벤에게 돌리고 있는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있다. 바로 모차르트의 변주곡 ‘아, 어머님께 말씀드리죠(Ah, Vous Dirai-Je, Maman)’이다.
변주곡이란 하나의 테마(주제곡)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형태로 변형하여 연주하는 것이다. 변주마다 속도와 조가 변환되어 느린 장송곡처럼 들리다가도 경쾌한 동요처럼 들리기도 한다. 해리엇에게 이 곡을 추천하는 이유는 변주곡만큼이나 아이들도 다양하고 입체적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사실 해리엇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서 어긋난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 모두가 들어야 하는 곡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도덕적 틀 안에서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고 개성을 펼칠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시대적인 흐름에서 오는 차이를 틀린 것으로 규정하면 안 된다.
기성의 잣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가령 요새 초등학생들의 인기 장래 희망이라는 ‘유튜버’는 소위 말하는 ‘사자 직업’만큼의 파급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아이들이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집 나간 아이들’이 그 매끄러운 식탁으로 다시 모여들지 않을까?
해리엇이 꿈꾸던 완전한 행복은 확실히 존재한다. 바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말이다. 자신의 기준에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개성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다섯째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곧 우리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치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시선을 따라 성장하므로 우리의 시선은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생각해보자. 당신의 시선은 불행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행복을 좇고 있는가?
만약 행복을 향하고 있다면 그 행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2019/07/12 15:05 2019/07/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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