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1

나이 듦, 그리고 아쉬움 없는 인생
중국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한 사람이 진시황인데, 천하를 모두 차지하고 보니 죽기가 싫었다. 죽지 않으려면 늙지 말아야 한다.
도사의 말을 들은 그는 이슬을 마시고 살기 위해 ‘승로반(承露盤)’ 즉 이슬 받는 커다란 구리쟁반을 만들었으며, 도사 서불과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동쪽 바다로 보내 불로초, 불사약을 구하게 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영토를 순행하던 도중 사구(沙丘)에서 49세 한창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죄수 70만 명을 끌어다 만들기 시작했던 무덤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한쪽으로는 불사약을 구하면서 한쪽으로는 몇십 년 동안 자신의 무덤을 만들다 끝내지 못했던 진시황은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섣달 그믐날 밤이 서글픈 까닭은 무엇인가?
어찌 진시황만 늙어 죽는 것을 슬퍼했겠는가. 광해군도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1616년 문과 시험에 ‘섣달 그믐날 밤이 서글픈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왕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유능한 관리를 뽑았는데, 관리를 뽑는 방법 가운데 가장 객관적인 방법이 바로 과거였다. 소과(진사·생원시)와 대과의 초시·복시에 모두 합격한 33명이 왕 앞에 나아가 최종시험인 전시(殿試)를 치렀다. 왕은 정치, 경제, 문학, 역사, 철학에 관한 질문을 출제하고, 응시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썼다. 전시에 참여한 33명은 어차피 모두 급제할 것이므로, 왕은 정치 현안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시기에 적절한 문제를 출제했다. 그런데 갓 마흔이 지난 광해군이 엉뚱하다 싶은 문제를 낸 것이다. 문제의 본문부터 출제자의 오랜 고민을 보여준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는 것이 밤이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관에서 쓸쓸히 깜박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랬는가? 왕안석(王安石)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시를 지어 탄식했다. 소동파(蘇東坡)는 도소주(屠蘇酒, 새해 차례를 마치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함께 나눠 마시는 술로 사악한 기운이나 악귀를 물리치고 장수를 돕는 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를 나이순에 따라 젊은이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슬픔을 노래했다. 이것들에 대해 상세히 말해보라.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차츰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노라.”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1616년 증광문과 급제자 가운데 이명한의 답안지를 읽어보자. 이제 막 21세가 된 청년이 어찌 늙은이의 서글픔을 알겠는가마는, 자신이 그동안 읽었던 책 속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답안지를 작성했다. 기승전결 식으로 썼는데, 첫째 단락부터 읽어보자.
“‘밝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잠깐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그 가운데 늙어가는구나!’ 이는 위응물(韋應物)이 한 말입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단 말입니까? 하루가 지나도 사람이 늙으니, 한 해가 지나갈 때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집사 선생(출제자)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제 마음에 서글픈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철이 번갈아 갈리고 세월이 오고 가니,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백 년 뒤의 세월에는 내가 살아 있을 수 없으니, 손가락을 꼽으며 지금의 이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흥에 겨워서가 아닙니다. 묵은해의 남은 시간이 아쉬워서 아침까지 앉아 있는 것이고, 날이 밝아오면 더 늙는 것이 슬퍼서 술에 취해 근심을 잊으려는 것입니다. 풍악 소리와 노랫소리가 귀에 가득 울리게 하고, 패를 나누어 노름하면서 정신을 몰두하는 것도 억지로 즐기려는 것일 뿐입니다.
십 년의 세월이 어느 하룬들 아깝지 않겠습니까만, 유독 섣달 그믐날에 슬픔을 느낍니다. 하루 사이에 묵은해와 새해가 바뀌니, 사람들이 늙음을 날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날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사실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늙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물음에 따라 조목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양의 여관에서 해가 바뀔 때 촛불을 밝히고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두보(杜甫)입니다. 여관에서 깜박이는 등불을 밝히고 멀리 떨어진 고향을 그리워하며, 거울로 허옇게 센 머리를 들여다보며 안타까워 한 사람은 고적(高適)입니다. 온 세상에 재주와 이름을 떨쳤건만 어느덧 늙어버렸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저무는 해에 감회가 깊어진 것입니다. 젊었을 때 품었던 꿈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는데, 힘겹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늙음이 안타깝고 흐르는 세월이 안타까워 잠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왕안석의 시이고, 도소주를 나이순에 따라 나중에 마시게 되었다는 것은 소동파의 시입니다. 사물은 다하면 새로 시작되고, 옛사람이 사라지면 새 사람이 태어나니, 새것에 대한 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소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어린 사람이 먼저 마시니, 나중에 마시는 사람일수록 늙은 사람입니다. 지난날을 돌이키면 괴로움만 남는데 살아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글로 표현하려면 모두 안타까운 호소일 뿐입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마음은 다 같고, 옛날이나 오늘이나 달은 다 같습니다. 어릴 때는 폭죽을 터뜨리며 악귀를 쫓는 설날이 가장 좋은 명절이어서, 섣달 그믐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어 의지와 기력이 떨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세월을 묶어둘 수도 없고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건만 수레를 풀어 쉴 곳은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유감없는 인생을 꿈꿉니다
중략하고, 이명한의 답안지 말미는 그런데 의외의 기개가 엿보인다. 기승전결의 마지막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옛사람들이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우며 느꼈던 감회를 헤아려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감회는 이들과 다릅니다. 우임금이 짧은 시간이라도 아꼈던 것은 왜 그랬겠습니까? 주공이 밤을 지새우고 날을 맞이했던 것은 왜 그랬겠습니까? 저는 덕을 닦지도 못하고 학문을 통달하지도 못한 것이 늘 유감스럽습니다. 아마 죽기 전까지는 유감스럽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 해가 저무는 감회는 유감 중에도 유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스스로 경계합니다.
‘세월은 이같이 빠르게 지나가고 내게 머물러 있지 않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 살아서는 볼 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자. 등불을 밝혀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를 한평생 하자. 그렇게 하면 깊이 사색하고 거듭해서 학습하게 되어, 장차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니, 마음에 무슨 유감이 있으랴!’ 집사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답안지를 제출합니다.”


늙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재위 8년 동안에 어려운 일이 많았다. 아우 영창대군과 형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그는 ‘섣달 그믐날 밤이 서글픈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급제자 이명한은 중국의 대문호 두보와 소동파의 감회를 헤아릴 수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감회는 이들과 다르다고 선언하면서, 단순히 늙어가는 게 슬픈 것이 아니라,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에 통달하지 못하는 게 슬프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늙더라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면 서글플 게 없다는 자긍심이기도 하다. 인생을 다 살아보고 쓴 답안지가 아니어서 피상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인격 수양과 학문 성취에 인생을 걸었던 조선의 문인다운 기개가 엿보이는 답안지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이 모범답안에 위로를 받지 못하고 갈등하다가 몇 년 뒤에 인조반정으로 왕궁에서 쫓겨났지만, 이명한은 자신의 답안지 그대로 늙음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늙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그 무엇이 정답은 아니다. 어쩌면 말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늙음의 지혜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경진(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8/03/12 11:47 2018/03/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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