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2

쌀쌀한 저녁 산책과  미적지근한 닭고기 야채수프

몸이 아파오는 날, 혹은 시린 가을바람이 마음속까지 스미는 저녁. 우리는 공원으로 간다. 거기에는 우거진 나무가 있고 숲이 뱉어낸 선선한 공기가 있다. 분주한 도심 속에서 작은 공원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나무와 풀, 꽃, 작은 곤충과 동물이 만든 작은 우주가 거기에 있다. 그 틈을 거닐다 보면 새삼 내 몸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공원으로 간다
그놈이 또 찾아왔다. 그놈이란 1년에 한 번씩 찾아와 내 일상을 엉망으로 휘저어놓는 반갑지 않은 손님, 위장병이다. 위장병은 보통 서너 달을 머물다 간다. 놈은 올해도 고약해서 내 일상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일하려고 몸을 일으키면 자기가 왔는데 어디를 가느냐고 호통을 치며 내 옷자락을 잡아 주저앉히는 식이다. 놈이 부리는 생떼에 지쳐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들만 떠오른다. 특히 날이 어두워지면 더욱 우울해진다. 그래서 나는 해가 지면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바깥으로 나간다. 도저히 나갈 수 없는 날도 있지만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할 수 있는 날이 더 많다. 집에서 나와 곧장 공원으로 간다. 동네에 안양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는 한적한 날도 붐비는 날도 있다. 한적한 것은 그 나름대로 조용한 맛이 있고, 사람이 좀 있는 것도 활기가 느껴져서 좋다. 공원에 가면 사람이 있다. 강이 있고 나무와 풀, 꽃이 있다. 강은 큰 변화 없이 항상 제 모습대로 흐르지만 나무와 풀, 꽃들은 날마다 달라진다. 어제와 같은 날이 하루도 없다. 모두 살아있기 때문이다.
 
식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나는 작년부터 내 자신을 식물교 신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반 아니 90% 정도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신자로서 딱히 하는 일도 없다. 그저 일상에서 식물을 사랑하는 것, 그뿐이다. 식물을 사랑한다는 것도 정원을 가꾼다거나 연구를 하는 등의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돌보는 식물은 ‘포켓러브’라는 작은 난 하나밖에 없다(나는 그 화분을 ‘러브’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작년은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여러 괴로움이 있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고립감이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산 작은 화분이 출구가 없을 것 같았던 고립감에서 나를 빠져나오게 해주었다. 내가 화분을 위해 한 일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매일 볕이 좋은 시간에 밖에 내놓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끔 물을 주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일이 내 마음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화분을 밖에 내놓으려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하루에 한 번씩 밝은 햇빛을 보게 되었고, 물을 줄 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화분에게 꺼내놓을 수 있었다. 몇 달 동안 이 단순한 두 가지 일을 반복하면서 나는 조금씩 환한 쪽으로 나오게 됐다.
올해는 산책이 나를 어둠에서 끌어내 준다. 산책로는 온갖 살아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과 식물들, 매일 변하는 날씨. 살아있는 것은 움직인다. 생생하다.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어두운 방 안에서 했던 생각들이 아주 얄팍하게 느껴진다. 나를 점령하던 악의나 위악이 우스워지고 불안은 불안일 뿐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함께 걷는 이유
얼마 전에는 친구가 병문안 차 우리 동네로 와서 산책을 함께했다. 나는 친구가 오는 시간에 맞춰 닭고기 야채수프(죽이 너무 물려서 내 방식대로 만들어 본 것인데 이것을 며칠 먹고 상태가 호전되었다)를 보온병 두 개에 나눠 담아 가지고 나갔다.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금물이라 찬 기운을 없앤다는 느낌으로 미적지근하게 데운 수프였다.
친구는 러시아워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산책로로 들어서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을은 아직 남아서 하늘에 옅게 퍼졌다. 옅은 노을이 구름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딱 좋은 타이밍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로는 꽤 쌀쌀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며 새벽까지 통화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된 것이다. 나는 이맘때의 쌀쌀한 아침저녁 공기를 좋아한다. 쌀쌀한 공기는 왠지 청량하게 느껴진다. 쌀쌀한 공기에 뜨거운 커피나 낙엽 냄새가 섞이면 완벽하다. 아직 잎이 떨어지는 계절은 아니지만 이제 막 자리를 뜬 여름이 남기고 간 냄새가 섞인 쌀쌀한 초가을 공기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다.
산책로는 입구를 기준으로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한쪽은 정비가 잘된 길로 벤치와 가로등이 많다. 사람들은 주로 이쪽을 이용한다. 다른 쪽은 풀이 울창하다. 하루살이 떼가 극성이고 길도 어둡지만 그만큼 자연 속에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입구에 서서 둘 중 어느 방향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어둡고 울창한 길로 가기로 했다. 정비가 잘된 길은 옆에 철도가 있어 기차나 지하철이 수시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다소 시끄럽다. 특히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 우리에게는 그 길이 더욱 시끄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둡고 조용하고 풀냄새가 짙게 풍기는 길을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들꽃이 가을을 알리듯 여기저기에 피어서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 끝물에 비가 온 뒤라 풀은 더욱더 무성했다. 하루살이 떼를 지나갈 때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친구에게 알려주었다.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아래에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어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해는 이제 완전히 져서 사방이 깜깜했다. 가로등이 있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거기서 보온병과 숟가락 하나씩을 들고 닭고기 야채수프를 떠먹었다. 찬 기운은 없지만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수프는 산책하다 잠시 쉬면서 먹기에 적당한 음식이었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걸으면서 몸이 데워져서 춥지는 않았다.
“이렇게 초록을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친구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풀이 바람에 흔들렸다. 강 위에는 달이 떴다. 우리는 수프를 다 먹고 일어서서 길을 되돌아 나왔다. 가는 내내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난 이런 가을밤에 산책하는 게 너무 좋아.”
길이 끝나지 않기를 속으로 빌며 내가 말했을 때 어두운 방에서 혼자 했던 생각들은 이미 흩어져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이종산(소설가)



2019/01/04 14:52 2019/01/0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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