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1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감기약 같은 말들
말은 공기의 파동이다. 음악도 소음도 사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미묘한 파동이 우리의 귀를 살며시 때릴 때, 우리는 공기라는 분자의 진동을 통해 세상의 모든 만물의 마음과 만난다.
말은 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며, 우리 목소리의 공기 파동은 진동 이상의 깊이를 지녔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
이상한 일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서빙 일을 하는 여성이 고객의 말을 그냥 따라 해주면서 주문을 해도 팁이 30% 정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닌가 보다. 말은 정보뿐 아니라 감정, 분위기, 욕망, 기대를 전하는 멀티 능력이다. 언어에는 심리적 온도가 있다.

슬픔을 감싸 안은 따뜻한 말들은 영혼을 녹이고 상처를 치유한다. 예를 들면 ‘괜찮아’ 같은 말들. ‘사느라 수고했어요’ 같은 말들. 상담하면서 나는 이 말들을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한 봉지의 감기약처럼 부드럽게 내담자에게 풀어 놓는다. 아주 단순한 말 한마디임에도 불구하고 내담자들은 어떤 때는 짐승처럼 오열하기도 한다.
대체 저 말들은 어떤 방식으로 내담자의 무엇에 다가가 노크한 것인가. 그때 흘러나오는 내담자들의 눈물, 저 많은 물은 대체 몸의 어느 곳에 숨어 있었던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내담자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나 보다. 가끔 생각해본다.

엄격하고 단아했던 내 아버지가 단 한 번이라도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한 명임을 증명했던 나의 성적표를 받고 그냥 ‘잘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태양처럼 따뜻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내 어머니가 ‘넌 해야 해’라고 잘라 말하는 대신 ‘넌 할 수 있어’라고 보살펴 말해주었더라면. 아쉬움이 들 때면 대신 아이들에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조금은 닭살 돋더라도 ‘엄마는 널 믿는다’라고. 그리하여 좋은 기억의 갈피에는 언제나 좋은 말들이 새겨져 있다.

어느 해 여름, 대학 지도교수님께서 내 손을 잡고 하셨던 말씀. ‘언젠가 세상에 네 목소리가 울려 퍼질 거야’라던 그토록 강력한 예언들. 나는 이 말을 나침반 삼아 전공도 다른 영화평론가 모집에 응모하지 않았던가.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말로 이루어진 삶의 노래들. ‘널 이해해’라는 말들. ‘나도 같이 느껴’라는 말들. ‘난 네 편이야’ 같은 말들. 이런 말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음표처럼 살며시 다가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뒤들어 놓는다. 정반대의 일도 가능하다.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압정같이 뾰족한 기억도 역시나 가시 돋친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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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말로 떠나는 여정
말은 온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을 건네고 듣는 과정 안에는 각국의 문화적 경험과 체험이 녹아 들어가 있는 일종의 미니 여행이 포함되어 있다. 외국인을 만나 외국 말을 듣는다면, 그 말을 알아 들 수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말은 복잡한 음향이 되고, 신비한 미지와의 조우로 변모한다. 소설가 얀 마텔은 『베아트리체와 버질』에서 문화적 체험으로써의 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비유지만 영어가 재즈라면, 독일어는 클래식이었고, 프랑스어는 교회음악이었으며, 스페인어는 거리의 음악이었다. 따라서 단검으로 그의 심장을 찌르면 프랑스어가 피처럼 흘러나오고, 그의 뇌를 잘라 열면 뇌 이랑이 영어와 독일어로 싸여 있으며, 그의 손을 만지면 스페인어가 느껴질 것 같았다.’ 우리들의 모국어, 어머니의 말은 우리들의 일부로 심장과 핏속에 녹아 있다. 또한, 말은 인간 성격의 일부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결박처럼 우리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거친 성격의 사람은 거친 말을 쓴다.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은 부드러운 말을 쓴다. 감정이 담긴 또랑또랑한 말에는 에너지를 얻고, 조금 더 이완되고 천천히 흘러가는 말에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떤 말투를 지닌 사람이나 어떤 억양과 고조를 담은 말들을 다른 사람의 말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데, 그때 그 말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며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좋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즐긴다. 어떤 사람은 참말만 한다. 영화 <클로저>에서 앨리스는 ‘거짓말은 여자가 옷을 벗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늘 거짓말을 한다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늘 참말만 한다면 재미를 놓치게 될 것이다. 재치있는 말이란 농담, 여유, 지능이 겸비된 고도의 예술 작업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큰일을 먼저 하라. 작은 일은 저절로 될 것이다’ 이 말이 병원 복도에 붙어 있다면 진지한 표어가 되겠지만, 화장실 안쪽에 붙어 있다면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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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랑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말에 관한 여러 영화 중 아직도 가장 뇌리에 남아 있는 걸작은 단연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 (Talk to her)>였다. <그녀에게>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표현대로 ‘고독, 질병, 죽음, 광기’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써 ‘말’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아주 상반된 두 명의 남자가 나온다. 투우사 마르코는 첫 등장부터 눈물을 흘린다. 역시 투우사였던 애인 리디아가 경기 도중 소뿔에 받쳐 혼수상태에 이르자, 말 대신 공상의 힘을 믿기로 한다. 그는 사랑하는 리디아가 병상에 누워있는 첫날 밤에 이미 그녀가 자신의 입술에 키스하는 꿈을 꾸고, 인간의 영혼을 비둘기로 형상화한 ‘Cucurucucu Plaroma’ 같은 노래를 듣는다. 그는 단 한 번도 식물인간이 된 애인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말이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마르코는 리디아를 위해 울 수 있지만 말을 걸 수는 없다.

반면 소박하고 여성스러운 베니그노는 짝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일념으로 간호사가 되었다. 창문 너머로 훔쳐보다 반하게 된 알리시아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이르자, 무용수였던 알리시아를 위해 그녀가 사랑했던 일들을 대신한다. 무용 관람을 하고 무성 영화를 보고 그렇게 그녀의 육체를 대신 하는 걸어 다니는 녹음기로 세상을 잘 보고 들은 다음, 그녀에게 그날그날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 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말 걸기’이다. 상대는 대답도 없고 아무런 대꾸도 없지만, 베니그노는 알리시아가 자기 말을 다 듣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그마치 4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이 된 알리시아에게 말을 건다. 육체를 가진 언어가 의식을 깨우는 듯, 결국 어느 날 알리시아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녀에게>는 진짜 사랑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것이 아무리 소소해도 꾸준한 말 걸기는 결국 침묵과 어둠에 싸인 육체와 영혼을 일깨우는 기적을 일궈낸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을 하고, 인형에게 얼굴을 대고 웅얼거리며, 하다못해 벽에라도 배구공에라도 중얼거린다.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에너지와 피가 돌고 있는 표현 가능한 생명체,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담자의 모든 과거의 침묵을 안에 품고, 내담자가 하는 모든 말을 비밀의 벽장에 소중하게 간직한 채, 오늘도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상대의 말을 품에 안으면, 뭐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이 인간에게서 말은 저절로 새어 나온다.


심영섭(심리학자, 영화평론가) 


2018/05/21 10:43 2018/05/2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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