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2

그때, 나를 위로한 소리
우리는 빛과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산다. 만물은 저마다 소리를 낸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침묵의 벽을 뚫고 나오는 소리들.
소리는 만물이 저마다 살아있다고 내는 기척이고 신호다.
때로는 소리들이 나를 잠식하고, 다시 회복시킨다. 지치고 병든 몸을 위로했던 그때 그 소리들.



나를 일구고 키운 소리들
만물이 그렇듯 우리 몸도 소리를 낸다. 배고플 때 위장에서 나오는 꼬르륵거리는 소리,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 기지개 켜는 소리, 웃음 소리, 기침 소리, 방귀 소리, 심장이 뛰는 소리, 혈관에서 피가 급류처럼 흐르는 소리…….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 시절부터 음향적 세계에서 산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듣던 그 태초의 소리는 우리 무의식에 남는다. “그곳에선 피가 졸졸거리고, 물이 꾸르륵 소리를 내고, 위액이 꼬꼬댁거린다. 담즙과 젖빛 임파액이 좁은 길목에서 휘파람을 분다. 당신이 미역 감는 양수가 기분 좋게 찰랑거린다.”(크리스티안 생제르, 『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온통 소리의 향연 속에 있다. 소리는 청각을 울리는 모든 음향적 진동을 포괄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감정과 신체에 지속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대여섯 살 무렵 풍뎅이 목을 비틀고 뒤집어놓으면 풍뎅이는 날개를 펴고 바닥을 쓸며 붕붕거렸다. 나는 풍뎅이가 붕붕거리며 공기를 진동시키는 소리에 귀 기울였는데, 그게 잔인한 것인 줄도 모른 채 그 놀이를 즐기곤 했다. 어쨌든 그토록 어렸을 때 내가 소리의 세계에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소리에 이끌려 귀를 기울인다. 아기를 재우는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새벽 문 앞에 조간신문 떨어지는 소리, 젊은 여자가 크루아상을 씹고 양상추를 아삭아삭 씹는 소리, 대숲에 스치는 바람 소리, 바닷가의 파도 소리, 낯선 지방을 지나다가 여관방에 들었을 때 늦은 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이의 두런거리는 소리,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도마 소리, 아기의 옹알거림, 꽃 둘레에서 잉잉대는 벌들의 소리, 풀잎 위로 미끄러지듯 스쳐 가는 뱀의 기척, 참새가 포르릉 하고 날갯짓하는 소리……. 이런 소리는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이끈다.
마음을 사납게 만드는 소음은 청각적 압력이고 공격이다. 더 많은 에너지의 소비를 장려하는 산업사회 이후 세계는 더 많은 소음을 만든다. 소음에 장기간 노출될 때 일어나는 신체 이상에 대한 의학적 연구와 보고는 드물지 않다. 소음이 일으키는 청각 공해는 위장 점막을 자극하고, 혈액 순환, 심장체계에 영향을 미치며, 불쾌감과 함께 피자극성, 공격성, 초조감을 키운다. 도시의 인공물이 만드는 불협의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짜증을 부른다. 심지어 공동주택에서는 층간 소음으로 인한 불화와 시비가 폭행이나 살인으로 번지기까지 한다.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나 발작적으로 울리는 경적, 오토바이나 트럭 바퀴가 미끄러지거나 급정거하는 소리, 공사장에서 나오는 굴착기 소리, 이웃집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 소음의 범주에 든다. 집 밖을 나서 거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소음이 우리를 포위한다. 걷는 것은 이 소음의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다. 종일 인파가 모이고 흩어지는 도시의 광장, 아케이드, 카페에서는 말소리가 소음으로 변해 웅웅댄다. 소음은 고막을 후벼 파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며, 결과적으로 내장, 심장, 혈관을 통제하는 자율신경계에 과부하를 일으킨다. 소음이 일으키는 청각 공해에 장기간 노출되면 불쾌감과 불안을 물론이거니와 이명(耳鳴) 같은 감각 장애, 정신분열증 같은 질병에 시달릴 수도 있다. 온갖 위협적 소음은 불안, 두통, 정신과 질환을 유발할 수도 있다. 소음에 시달리며 사는 것이 더 쉽게 불행해지는 것은 도시에서는 누구나 항구적 소음 공해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더없이 아늑한 고요와의 만남
마흔 무렵 서울 살림을 접고 시골에 집을 짓고 내려와 삶을 꾸렸다. 집 뒤로 약수터를 품은 야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 넓은 저수지가 있는 경기도 남단의 시골이었다. 고라니가 수시로 출몰하고, 간혹 너구리도 나타났다. 시골에 들어와 살며 새삼 느낀 것은 이곳이 소음 공해로 찌든 도시와는 다른 신세계라는 점이다. 낮밤없이 시끄러운 도시 소음 속에서 시달리다 온 나는 시골의 고요와는 서먹서먹했다. 특히 시골의 밤은 한없이 고요해서 20db의 가장 낮은 소리의 밀도로 빚어진 침묵이 어둠과 함께 공중에서 내려와 넓게 자리 잡을 때 소음에 길들여진 내 청각 기관이 그 침묵을 못 견뎌 했다. 시골에 내려와서도 한동안 도시에서 살며 얻은 항구적 난청이라는 지병(持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봄마다 텃밭에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고, 마당과 그 주변에 작약과 모란, 홍매화와 영산홍 따위를 심고, 연못을 파서 수련을 부지런히 가꾸었다. 차츰 시골 생활의 즐거움에 빠져들며 비로소 내 청각 기관은 침묵을 오래된 벗처럼 다정하게 받아들였다. 시골 살림을 꾸리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바가 있다는 점이다.

봄에는 봄의 소리가 있다. 산골 계곡의 얼음이 녹아 흘러내려 가는 소리, 물가의 버드나무 가지가 하루가 다르게 연초록으로 변할 무렵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 소리, 북방산개구리가 하천에서 호르륵 호르륵 우는 소리

처음 시골에 내려간 초봄에 들었던 그 소리가 밤새 울음소리인 줄 알았다.

공중에 높이 뜬 종달새의 우짖는 소리,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울음소리 따위다. 그 봄의 소리 속에서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새싹을 틔운다. 여름에는 여름의 소리가 있다. 커다란 파초 잎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 풋감이 가지에서 땅에 떨어지는 소리, 하늘이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다가 마침내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빗소리, 간검은 구름장에서 내리꽂히는 번개와 우레 소리, 비가 그친 한낮의 매미 소리, 여름밤 무논에서 떼 지어 우는 개구리 울음 소리, 새벽 예불 때 울리는 종소리……

여름은 제가 품은 소리들로 풍성해진다. 집에서 가까운 숲은 녹음으로 울울창창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숲은 솨아솨아 파도 소리를 낸다. 숲속에서 귀를 기울이면 바람 소리 속에 텃새들, 살무사, 도마뱀, 개구리, 다람쥐, 고라니……

 따위가 바스락대며 움직이는 기척을 들을 수 있다. 숲속에 사는 생물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내는 작은 기척을 엿들을 수 있다. 가을에는 가을의 소리가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듣던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 노랗게 잘 익은 모과가 모과나무에서 떨어져 구르는 소리, 저물녘 아궁이에 불을 들일 때 나뭇가지에 올라붙은 불이 타오르며 하고 내는 소리, 외양간에서 슬프도록 큰 눈을 껌뻑이는 소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워낭소리, 집 개가 공중에 높이 뜬 달을 보고 공허하게 짖는 소리, 심야에 등불을 끄면 어두운 수풀 속에서 높아지는 풀벌레 울음소리…….

그 가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고독의 풍요 속으로 들어선다. 우리 자아는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 깊어진다.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다. 동지 지나면서 초빙과 북풍이 겨울을 예고한다. 어둡고 춥고 축축한 겨울이 오면 해가 떠올라도 공기는 차갑다. 한해살이 초복식물들은 덧없이 시들어 바스락거린다. 한밤중 얼어붙은 호수에서 나는 쩡쩡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북풍이 내는 사나운 소리, 폭설 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겨울밤은 대체로 적막하다. 겨울밤이 내는 소리는 그 적막의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스무 살 무렵 고전음악에 빠져 살았는데, 그 시절 나는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나는 음악에서 소리의 원형, 리듬의 음향적 완성을 느꼈다. 나는 음악이라는 불후의 소리에 빠져 세계의 비참을 견디고 저 너머 내가 살아보지 못한 아련한 세계를 동경했다. 이제 나는 내면의 고독 속에서 귀로 세계를 경청한다. 고막을 울리는 온갖 소리는 거기에 뭔가가 있음을 알린다. 귀는 단순한 청각 기관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정신기관이다. 자연의 소리는 세계의 그리운 기척이다. 그러나 도시의 소음은 생명의 가능성을 갉아먹고 소진시킨다. 나는 심리적 염증을 낳는 소음이 아니라 마음에 내면적인 정일함, 즉 고요와 평안을 주는 자연의 소리 속에서 살고 싶다. 내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온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문일완(남성패션지 <루엘> 편집장) 


2018/05/21 10:35 2018/05/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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