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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왕의 법칙
1990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실험 하나가 시작되었다.
이 실험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오만함이 드러난 사례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축적된 분자생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인간 유전자가 간직한 비밀을 낱낱이 밝혀내고자 하는 이 실험의 이름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였다.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가 모든 생물을 총망라한 생명의 신비를 밝혀줄 거대한 진보의 한 걸음이 될 것이라 믿었다. 실험이 완성되면 인류의 난치병이 일거에 해소되고, 무병장수의 꿈이 실현되리라 큰 기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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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석(갑상선내분비외과 교수)

무병장수의 꿈을 향한 인류의 도전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15년 이상의 예상기간보다 한참 이른 2000년 게놈의 기본적인 정보를 공개할 수 있었으며, 2003년에 공식적으로 인간 게놈 서열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이다. 사람들은 질병 극복이라는 소박한 목표를 넘어 인류의 진화나, 심지어 우리 손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신의 영역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마치 성경시대에 인간이 신과 비슷한 위치에 이르기 위해 쌓아 올렸던 바벨탑에 비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환상을 품고 기대했던 바와 달리 새로운 생명 창조는커녕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된 지 14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여전히 간단한 질병 극복도 힘겹고, 더구나 무병장수의 꿈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게놈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가장 큰 기대를 가졌던 분야는 암을 위시한 난치성 질병의 치료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이 다 그렇듯 한두 개의 유전자 이상으로 생기는 간단한 질병은 지극히 드물어 우리가 알고 있는 병 대부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난치병은 여전히 난치병이고, 특히나 암은 여전히 인류의 난적이다. 지금의 과학 수준으로도 암은 장님 코끼리 더듬는 정도의 ‘무지함’을 넘어설 아주 간단한 실마리조차 제공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계속 뛰는데, 왜 우리는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인류는 늘 많은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해 왔다. 어느 정도 질병을 극복했다 싶으면 또 새로운 질병이 등장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나서야 겨우 그 질병을 이길 실마리를 찾아내곤 했다. 특히 우리가 현재 가장 큰 난적으로 여기고 있는 암은 인류 역사보다도 오랜 질병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아직도 암의 실체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암은 인류 최대, 최후의 난적이다.
과연 우리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산과 같은 난적을 이기고 산 너머에 있는 행복의 땅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우리 손에 쥔 도구는 작은 호밋자루 같은 수준에 불과하다. 저 산을 다 허물어뜨릴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 보인다. 그게 바로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나 같은 의학자가 느끼는 불가항력과 같은 감정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20여 년째 죽어라 공부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로 답을 대신해 볼까 한다. 바로 ‘붉은 여왕의 가설(Red Queen Hypothesis)’이란 이야기이다. 이 가설은 루이스 캐럴의 명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에서 착안한 말이다. 소설 속 앨리스는 거울 나라에서 붉은 여왕과 함께 나무 밑에서 계속 달리게 되는데, 아무리 달려도 늘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렇게 묻는다.

“계속 뛰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이렇게 달리면 벌써 멀리 갔을 텐데.”
그러자 붉은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여기서는 냅다 달려봐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그 나라는 거울 밖의 내가 움직이면 거울 속에 비친 영상도 그와 같이 움직이게 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였던 밴 베일런이 ‘새로운 진화 법칙(A New Evolutionary Law)’이라는 논문에서 ‘지속 소멸의 법칙(Law of Constant Extinction)’을 설명하고자 이 내용을 예를 들었다. 그는 논문에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가운데 90%에서 99%가 멸종했다고 했는데, 다른 생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화가 더딘 생명체가 결국 멸종한다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제자리에 있고자 해도 냅다 달려야만 하며, 앞서 가려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장면이 거울 속 붉은 여왕의 나라와 같다는 의미다.


우리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가시밭길이었다. 질병에 대한 인류의 대처는 언제나 시기를 놓쳤으며, 의학의 발전도 늘 한걸음 뒤졌다.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도 사람들은 여러 질병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암 같은 병은 현재까지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벽이다.
하지만 인류는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었다. 어떤 위기가 닥치면 그것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게다가 지금은 과거의 어느 때와도 다르다. 가장 난적이자 인류를 가장 많이 살해하고 있는 무서운 ‘질병’을 극복하고자, 절박한 심정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물론 이 전쟁의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는 질병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며 우리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지금의 일은 과거 선조가 저질렀던 어리석은 시도처럼 단지 우리의 허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냅다 달리고 있다.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두 배는 더 빠르게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8/01/25 15:26 2018/01/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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