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Story


각막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김응권 교수
마음의 창을 지키는 길,
천천히 걸어 끝까지 간다


완치를 장담할 만큼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현재로서는 병의 진전을 늦추고 불편을 덜어주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아득해 보이기만 하는 목표와 현실 사이의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메우려면 진료실과 연구실을 오가는 박쥐 생활이 불가피하다. 수많은 환자의 시력을 지켜서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씨름하는 ‘황금박쥐’ 인생인 셈이다.
에디터 최종훈 | 포토그래퍼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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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사는 초등학생 꼬마 아가씨의 각막 질환을 고쳐줬더니,
 아이는 새해 인사가 담긴 카드를 직접 만들어 보냈다.
이런 게 제일 소중한 선물이라며 흐뭇해하는 김응권 교수.

“스트레스는 역시 환자에게서 옵니다. 기술적인 한계로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괴롭습니다. 의사로서 제법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각막이식처럼 까다로운 수술을 대할 때면 여전히 신경이 쓰입니다. 기술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마음가짐은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여도 언제나 매한가지입니다.”

 썩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죽을 짬도 없단다. 못 들은 척 한다. 그런 타박이라면 세브란스병원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질문부터 들이대고 대답을 재촉한다. “아, 이거…”란 탄식을 토해내면서도 김응권 교수는 꼬박꼬박 답안을 꺼내놓는다. 쾌재를 부르려는 순간, 김 교수의 입에서 엉뚱한 고백이 튀어나온다. 자신은 박쥐 같은 의사란다. “진료실과 연구실이 겹치는 자리에 선 신세”란 풀이가 따라붙는다. 일가를 이룬 의사의 자기정체감치고는 특이하다 못해 기이하지만 아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진료와 연구, 교육이라는 대학병원 의사의 숙명에다 특유의 책임감과 완벽주의적인 성향까지 보태졌으니 바쁘다는 말이 꼭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진료실과 연구실을 오가는 황금박쥐

 김응권 교수를 치열한 시간싸움에 끌어들인 적수는 아벨리노 각막이상증이라는 질환이다. 눈동자 한복판에 단백질이 차곡차곡 쌓여 반점을 이루고 시간이 흐를수록 개수와 크기가 늘어 마침내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유전병이다. 청소년기부터 각막 혼탁이 시작돼서 50대에 접어들면서 시력이 곤두박질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1988년, 이탈리아 아벨리노 지방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가족에게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사실은 동양인들에게 더 흔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870명에 한 명 꼴로 발병한다. 전체 인구에 비례해 추산하자면 최소한 5만 명이 넘는 환자가 있다는 뜻이 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인자를 가진 이들이 라식이나 라섹, 엑시머레이저 같은 수술을 받게 되면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더 잘 보려다 아예 못 보게 될 수 있다니 소름끼치는 일이다.

 김 교수는 그처럼 무시무시한 질환의 실체를 규명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벨리노 각막이상증 환자에게는 각막을 건드리는 시력교정 수술이 실명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최초로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으며 대처 방법과 관련된 논문을 계속 써냈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수술 전에 반드시 검사를 거치는 문화가 정착되는 데 힘을 보탰다.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처임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가 그 사실을 파악해서 널리 알리는 일에 나서기 전까지는 가볍게 건너뛰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제는 간편한 검사법까지 개발되어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지만 김응권 교수의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전자 차원에서 질환의 원인을 밝히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면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한다. 유전 질환의 특성상, 가족들의 유전자를 모두 살펴야 한다. 토끼나 쥐와 같은 동물에게 인위적으로 병을 일으켜서 연구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없다. 한꺼번에 부르든, 아니면 개별적으로 찾아가든 전국에 흩어져 사는 환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추이를 봐야 한다.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완치를 장담할 만큼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현재로서는 병의 진전을 늦추고 불편을 덜어주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목표와 현실 사이의 간격을 줄일 방도를 마련하는 게 김응권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각막이상증연구소의 숙제다. 그리고 그처럼 아득해 보이는 결승점에 도달하는 길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려면 진료실과 연구실을 오가는 박쥐 생활이 불가피하다. 수많은 환자의 시력을 지켜서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씨름하는 ‘황금박쥐’ 인생인 셈이다.


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이 멀리 간다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진 덕분이죠.”
 스스로 택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문가의 자리에 오른 비결을 김응권 교수는 그렇게 설명한다. 이 또한 세브란스병원이 자랑하는 ‘명의’들에게서 자주 듣는 얘기니,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삶이라는 마라톤에서 어쩌다 선두에 서게 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다. 김 교수에게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의 방향을 좌우했던 ‘필연’들이 존재한다.

 김 교수는 외과 의사였던 선친의 병원을 놀이터 삼아 들락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부친이 물려준 유산은 직업만이 아니었다.

 의술을 베푸는 전문가로서 가져야 할 직업윤리, 특히 환자를 대하는 성실한 자세까지 덤으로 받았다. ‘고객(환자) 만족’을 으뜸가치로 여기는 김응권 교수의 사고방식은 “의사는 병원 가까이에 살아야 한다”라며 이사를 권하던 아버지, 김춘익 원장의 진료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대학병원 의사들은 당연히 고치는 진료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고칠 수 있는 병을 가진 환자를 만나면 품는 진료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메울 수 없는 의술의 공백을 환자와 의사의 교감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채워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사의 권위는 고칠 뿐만 아니라 품는 데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김 교수의 행로는 본격적인 수련을 앞두고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폐결핵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잘 먹고 잘 쉬는 게 치료의 기본이었지만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려야 할 의대생에게는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일단 일주일 동안 수업을 걸렀다.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한 주간을 더 쉬어보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하자 교수진에서는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잠깐 쉬어서 해결될 병이 아니라면 학업을 지속하면서 조절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로부터 두 해 동안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지만 다행히 건강과 학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은사를 비롯한 주변에 그 공을 돌린다. 여러 분야의 스승들과 동료들의 위로와 조언 덕분이라는 것이다. 고달픈 행군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조급한 생각이 들 때마다 곱씹던 “인생은 뛰는 자보다 걷는 자가 멀리 간다”라는 격언은 평생을 가는 깨우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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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서 성실한 자세를 전수받았다면, 폴 앤더슨으로부터는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배웠습니다. 선진 기술을 배워가서 다른 의사들을 가르치는 걸 보는게 자신의 기쁨이라던 그분의 마음씀씀이가 내 눈을 뜨게 했습니다.”


행복의 의미를 가르쳐준 또 다른 아버지

 1998년 9월 17일, 주요 일간지들은 빠짐없이 미국 변호사 폴 앤더슨 씨의 미담을 실었다. 일제 치하의 한국에 들어와 30년 동안 철원과 춘천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으며 세브란스병원 초대 안과과장을 역임했던 아버지(E. A. 앤더슨)의 뜻을 기려 25만 달러를 세브란스 안과에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폴 앤더슨 씨의 선행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20년 전에도 안과학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면서 모교인 에머리대학에 거액을 기탁했던 것이다.
 
 김응권 교수와 앤더슨 일가의 끈끈한 교분은 그가 ‘앤더슨 한국 안과 기금’의 첫 수혜자가 되면서 시작됐다. 에머리대학으로 건너간 뒤부터는 외국인 독지가와 유학생의 차원을 넘어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했다. 김 교수로서는 스물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난 부친을 대신할 멘토를 얻은 셈이었다.

 “얼 앤더슨 선교사님은 조지아 주에 단 둘뿐인 안과 의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에 그대로 머물렀더라면 풍요롭게 살았겠지만 멀리 떨어진 한국까지 와서 가난하게 살며 인술을 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폴 앤더슨 씨도 큰 부자가 아니었지만 한국 학생들을 위해 선뜻 목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어른의 가족과 교제하면서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배웠습니다. 앤더슨 씨는 선진 기술을 배워가서 다른 의사들을 많이 가르치라면서 그 모습을 보는 게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씀씀이가 내 눈을 뜨게 했습니다.”

 김 교수는 지금도 매년 두 차례 시간을 쪼개 앤더슨 씨를 찾아간다. 해외 학회를 갈 때 연수 때 만난 교수들과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에머리대학을 방문하는데 이때 아틀란타에 사는 앤더슨 씨를 찾아뵙는 것이다. 1998년 앤더슨 씨가 세브란스 안과에 25만 달러를 기부할 때 다리 역할을 했던 것도 김 교수였다. 뿐만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그 생생한 모범을 성실하게 따라가려 노력한다. 김 교수는 안과학회에서 주는 굵직한 상을 두 차례 받았는데, 한 번은 세브란스병원 안과에, 한 번은 에머리대학에 기부했다. 오래전에 받은 은혜를 일부나마 되갚는다는 뜻도 있었지만, 앤더슨 씨가 보여준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김응권 교수의 분주한 일상은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기세대로라면 정년이 백세라도 모자랄 판이다. 지난 설날 연휴에도 내내 연구실에 나와 논문 작업에 매달렸다. 3월부터는 주임교수 노릇을 해야 하니 시간의 압박은 더 심해질 게 분명하다.

 “어려울 때마다 세브란스 사람들이 잘 도와주셔서 여태까지 잘 지내왔으니 고마운 일이죠.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없지 않지만, 집안 어른의 말씀처럼 학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럼 마음이 좀 편해지거든요.”

| 김응권 교수 |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연세의대 안과학교실에 재직 중이며, 전문 진료분야는 각막, 백내장, 아벨리노 각막이상증 등이다.
미국 ARVO 정회원이며 각막이상증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2013/01/04 16:28 2013/01/0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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