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의 날개> 또는 <시지프스의 바위>

<악어의 눈물> 또는 <흰꼬끼리>

<기차길과 금붕어의 관계>?

 

우리는 늘 익사이팅한 일을 기대한다. 삶이 모노토너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것은 옳지 않다. 결국은 본질은 그러하지 않으며, 본질에 다다를 땐 견디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가끔 자기는 죽을 것 같다고, 곧 죽을 것 같다고 근심스레 얘기하는 환자를 본다.

그러나 실제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고, 소위 <미인의 무관심>이 보여진다.

라 벨라 인디퍼런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컨더리 게인을 얻으려는 건데, 우리는 그의 내면에서 절박하게 호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괴테가 말했다, 빛이 밝으면 그 어둠도 짙다고.

나는 또 생각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한다고.

니체는 말해다, 신은 죽었다고.

신은 또 이렇게 말하겠지, 니체는 죽었다고.

 

지난한 연습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삶도 자동적으로 운위되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획이 필요하다. 그 다음엔 검증도 있어야 겠고. 쉬운 것은 없다.

마음은 비워두자. 그리고 압지가 물을 흡수하듯 앞으로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며 내면화시켜야 한다. 난 영점조정을 하자. 가늠쇠조정, 가늠자 조정, 정조준, 사격! ! 난 아무 생각이 없다. 멍하게 모든 것을 꼼꼼히 적고 외우자. 겸손하게. 자만하지 말고 꾸준하게 또 과묵하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성실하여 당당하게, 능력있기보다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자. 또 다시 펄럭이는 의 깃발 꼿꼿이 서있는, 이 길을 난 돌이킬 수 없는,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명명하겠다. 소언다행, 말을 아끼고 행동을 앞세우자.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란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큭히 쌩스 기빙을 들으면 지금껏 난 참 잘난 척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 같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삶이 감동치며 느껴질 때, 현란한 외화(外華)는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흰 눈이 쌓인 오두막에 혼자 난로지피며 말없이 그 불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나 혼자만의 생각에 침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그 동안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은 어수선한 휩쓸림에 연연하고 천착했던가. 지금 나의 마음밭은 어떠한가? 참으로 쓸쓸하고 쓸쓸하니 쓸쓸하여라. 이제부터라도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자신의 中心을 지켜라. 화려한 거품에 더 이상 미혹되지 말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대지위에 내일의 견실한 씨를 뿌려라. 스스로의 추수(秋收)임에 그 땀의 화장 더욱 아름답고 뿌듯할지니, 쓸데없는 잔신경, 그 쓸데없는 낭비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치한 신경들의 언희에서 초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당한 솔직함이 우선된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나는 나의 삶은 운위하기도 분주한데>... 물론 결론은 니힐일지라도 그 과정에서의 그림에 의미를 두고 보람찬 하루하루를 그려가겠노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김소운이 썼던가, “가난한 날들의 행복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물론 작가의 말대로 가난은 자랑은 아니지만 그 속에 진주같은 소중한 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러하듯이 이제부터 마음이 가난한 나는 나의 각오를 존중하고 견지해야겠다. 내 가난한 마음을 위해서 축배를 들자.

 

예전에 고르기아스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이 말의 향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에 흔들흔들 떠 다니는 사념의 편린들을 바라보자니, 어쩌면 그가 은근한 달빛이 질퍽거리는 어느날 밤하늘에 설핏 유성처럼 스러지는 소()의 그림자를 밟았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 안에 소용돌이 치는 사념이 과연 있기는, 그 실체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암튼, 안다해도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이런저런 단상들을 횡설수설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오늘, 횡성에서의 마지막 진료인데도 덤덤하기만 합니다. 그렇죠, 어떤 의미를 쓸데없이 부하한다는 것도 감정의 허영이겠죠. 과장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나는, 이제 네 시간 남짓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의 마지막 횡성에서의 진료를 장식하겠습니다. 그리고나서 보건소 밖에 눈이 아프도록 다가서는 태기산을 바라보면서 진하게 담배 한 대 피울 것입니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에 회색의 감정을 기화시켜서.

 

 

 

 

 

 

Posted by 베스트닥터

2012/02/01 12:15 2012/02/0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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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상(浮游想)

부유상(浮游想)

 

자꾸 생각이 물위에서 종이배가 널뛰듯 춤추는 것처럼 밑바닥에서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도하고 또 올라왔다가 저멀리 사라지기도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본래 에는 그 나름의 性情이 있는 법, 그렇다면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의

誤謬였던가,

부글거리는 후회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슬며시 지워본다.

부디 지금의 나의 관점이 잘못이 아니기를, 그렇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기를...

점심시간이다. 點心, 마음에 을 찍어라! 의 의미는, 모반의 세월 그 기나긴 미망의 종지를 의미해야 한다.

아까부터 숨죽여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서워, 나는 무서워. 다가오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일들이 두려워,

글쎄 잘 해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계속 핵심의 언저리에서 생각은 겉돌고, 그러기에 더욱 불안해진다. 안돼! 이래서는 안돼! 열려진 가방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상황이 다가온다 해도 그 앞에서 열려진 가방이 되자. 누군가 그안에 무엇을 빼고 또 그 무엇을 넣는다해도 상관없는 난, 열려진 가방이다. 각오의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음을 편하게 두자. 왜냐하면 난 열려진 가방이니까.

 

지난 여름부터 참 生覺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의 닥쳐온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도 하고, 지나온 짧지않은 세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감개가 무량하더이다.

하루하루 후회없는 삶을 운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냐면 반추된 그 시간들은 거의 아쉬움의 빛을 던지며 가뭇없이 흘러갔으니까요. 산다는 것은 어쩌면 를 구하는 과정이라는 단상이 설핏 스치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지금껏 인생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난 는커녕 여직 밀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도 못한 셈이니 마치 퇴행되어 고착된 느낌은 박제되어 앙금집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발자국 또 한발자국씩 를 구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채우겠습니다.

 

횡성에서의 3년간 分明 무엇인가 내게 자양이 되었을 그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늠름하게 살아야겠다. 만일 오만한 착각에서 자신감이 비롯된다면 영원히 그 착각 깨어지지말저! 누구나 agoraphobia를 극복할 수 없도다. 오히려 그런 phobia를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겠군. 깨어지는 껍질, 그 고통이야 당연지사고 나비처럼 꿈꾸듯 감내한 후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온 Ego! 무엇을 보았니, 찰라같은 견오와 각성이 밀물처럼 밀려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거기엔 조그만 포플러 묘목 하나 심어질 때, 주위는 모두 일어서서 박수치며 합창하더라.

도망치듯 머쓱해져 달아오르는 Id, 만끽하라! 너의 당연한 몫이거늘...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담담하게 인정한다면 지옥같은 마음은 극락되겠지.

()를 아직 보지도 못했지만, 하여 꼬리조차도 언감생심이지만 소()는 결국 놓아야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기꺼이 접수한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지금, 난 기적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전설같은 이적을 바라는가. 어쩌면 이무기처럼 기다림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 그런 긍정적인 부분만 감가상각하고 이적은 없다고 믿자. 지치도록 두드릴 때 어느새 배게 되겠지. 누구나 꾸려나가는데 나만이 열외는 아니겠지. 침착하게 받아드릴 때, 슬그머니 드나드는 소를 보면서 승천하리라.

천 상병 시인의 말처럼 어차피 이 세상 소풍나온 것 아니겠는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록으로 편곡한 노래가 주병진의 2시의 데이트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 이어 나오는 노래는 이덕진의 <기다릴 줄 아는 지혜>.

요새 노래들은 왜 이러나? 김건모의 3집은 200만장이 판매됬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20명당 하나,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5집당 한 장씩 팔렸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음악성 운운하기엔 비재천학하고 하여간 경이로운 일이다.

 

고개숙여 인사합니다.

연극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대사를 되뇌어보세요.

느껴지나요?

난 항상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사랑을 당신은 당연하게 생각했죠.

이제 연극은 끝났습니다.

당신에게 난 안녕을 말합니다. <마돈나의 take a bow 에서>

 

오늘은 한식이다. 한식은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고 하는데(?), 난 한식으로 비빕밥을 먹었다? 이러다가 개기일식날은 일식으로 가쯔동을 먹을까?

 

한가지씩은 조예가 있어야 된다는데, 난 흐름에 실려 기호(嗜好)가 없으니 몰개성적임.

그냥 남들 하는대로 따라했던 거. 그런 사고방식이 종국에는 인생전체에 점철됨.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라이터는 던힐, 만년필은 듀퐁, 구두는 발리, 넥타이는 에르메스, 손수건은 닥스, 티셔츠는 아이스버그, 가디건은 미쏘니, 벨트는 세린느, 바바리는 버버리... 다원적일 수 없다면 한 우물만 파자. 카메오도 이제는 식상하다. 그렇다면 한 우물은? 패러디가 아닌 당연히 내가 선택한, 내가 가야 할 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냥 몰입하여 무아경에 이른 바보스럽기까지한 시선,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의 절규는 낯설지가 않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요즘은 포스트모던이 무슨 유행처럼 난무하는게 꽤 미래지향적인 그 말은 제법 뽐을 내도 시제의 정의조차 불명확하다. 그래서 또 포스트모던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결국은 쏘피스트 이래로 회의해왔던 실존의 피투성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소박하게 생각본다.

 

이 우리네 삶에 차지하는 무게가 실로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에 고소짓는다.

왜냐면 진료를 15분 남긴 지금 배가 고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허기가 실존이라면 역시 본질에 선행하는가.

 

학교 다닐 때, 이야기 하고파 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농담처럼 얘기하는 그 친구의 공허한 웃음소리에 짙은 고독이 배어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한 고독한 우울이 정녕 죽음에 이르는 이 아닐까요?

 

섬강교를 건너면 갑자기 풍경이 바뀐다. 산들도 강원도가 되고 더불어 나도 강원도가 되는데, 아는가? 내가 가는 횡성은 김유정의 봄봄에 나오는 점순이라는 것을.

그런데 요새 내가 눈치챈 비밀은 횡성이 알렉산드리아였다는 것.

그리고 난 고마움을 모르는 뻔뻔한 철부지였다는 것.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없이 흐르는 의식의 흐름에 자동기술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엉뚱하게도 갑자기 의식의 실체에 대해서 난 의혹이 생겼다.

마치 왜 뛰는지도 모르고 달렸던 타조모냥.

오랬만에 알퐁스 도테의 <월요이야기>를 읽었다. 거기서 마지막 수업을 발견했을 땐

오래전 헤어져 소식끊긴 국민학교 동창생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 횡성은 나의 알사스인가. 정말 이 시간이 영원히 끊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언제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내일로 미루었는데...

 

은하철도 999에서 메테르 같은 여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샤롯테 같은 여자, 단테의 베아트리체 같은 여자, 이러한 수다한 추상이 나로 하여금 꿈 꾸듯 여자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연암 박지원도 어둠에 쌓인 물이기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님메? 무릇 여자 뿐이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정확히 아지 못하는 가운데 두려움은 비롯되는도다.

 

친구가 선물로 로트레아몽을 주었다. 악마파와 같은 음산한 분위기는 차치하고라도 어째서 내게 그런 책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친구는 치기에 악마주의에 경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르멘의 하바넬라를 듣고 있자니, 돈 호세에 대한 그녀의 물어뜯는 열정이 느껴져온다. 그렇다면 그녀의 바람은 결국은 호세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 이율배반적인 사랑이여, 보상기제로 따져본다면 반동형성이라 하겠는데, 종잡을 수 없는 얄팍한 마음이여, 결국 에우리디케를 하데스에게 다시 보내게 된 것도 오르페우스의 의심많은 사랑의 아이러니 때문 아닌가.

프래그머티즘이 철학이 되는 것은 팝아트가 예술이 되는 것과도 같다.

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과도 같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끼리 모인다.

마지막 공중보건의사.

뫼르쏘의 부조리의 태양

Posted by 베스트닥터

2012/02/01 12:13 2012/02/0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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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NDSCAPE OF A RURAL CLINIC 330 (ENG)

TITLE: A LANDSCAPE OF A RURAL CLINIC 330

In 1992, I had to work at the rural town which is named Hoingsung in Kangwon Do because of the military duty. When I finished the term of three years and leaved there, a complicated delicate mood made me to write two pieces of writings. Last week, I remembered the memories of Hoingsung, so I remade one of the writings to tell you my experience.

People say it is beautiful the back of the man who know when he have to go, but I don't know when this small familiar space of clinic will relieve me. Maybe it would remain imprinted in my mind permanently like a faded picture.
Spring is already come and winter is passed away with the scar of brilliant melancholy.

Yesterday when I would go to Hoingsung from my home, the sky was gloomy dark like a lover who changed a mind and then throw the cool spring rain in the Youngdong highway. Arriving at health center and boiling the water in the coffee potter, I fell in the pond of thought with hearing the boiling sounds.      
Suddenly the melody of the music on the FM radio, that is "Still got the blues for you", cut my heart like a knife. It was the time that unknown jamais vu occupied in my mind.

On the way for the health examination of children at kindergarten in Kangrim Myun, the rain is thrown and penetrated into the front window of ambulance like an arrow with wetting my heart endlessly.
Afternoon after treatment on wheels in Maok Myun, which is my the last official duty, I went to the farewell party and drunk as I wish, but strangely I cannot be drunken. Instead, my consciousness became clear.        

Oh! Farewell party! then is it separation from you? but I don't any mood about that.
Since this morning, an mysterious choking had filled in my mind and made me confused.

Thank you for your service, Cheers! Among the exchanging of greetings and wine cups, I became smaller and smaller to 36cm with depressed. Finally I cannot help but to feel intolerable lonely melancholy.
At that time, I became aware of the reason of my mysterious choking like inspiration.
It was a stroke in my mind, the crack, in which is occupied by jamais vu, that became larger and larger finally to 36cm with regret and then compressed me. It hindered me from separation as the course of passing, although, in fact, the separation is not a period of meeting but a comma of meeting for promise for reunion.
That thought turned separation to be mature and made me comfortable.

Now I would say goodbye to you, of course, it is the separation for preparing reunion.  
Sincerely, thank you everybody for three years.
Adieu until we get together!

We all have any types of the experience like this, and then they soothe us from boring daily life. We have to bury these memories in the bottom of heart like a skeleton in the closet. Because our routine life should go on as that the show must go on, but we must not forget the precious memory like this. How beautiful it is to love these hidden memories in one's bone as if the laugh with sorrow that break your heart!  
    


Posted by 베스트닥터

2012/02/01 12:10 2012/02/0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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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NDSCAPE OF A RURAL CLINIC 330 (한글)

진료실이 있는 풍경 330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진정 아름답다는데 도대체 3년간의 세월의 손때묻고 또 애환에 얼룩진 이 세 평 남짓한 공간이 언제쯤 내 마음위에 뽀얗게 쌓인 미련의 먼지털고 날 놓아 보내줄지 모르겠습니다.

어쩜 내 가슴속 사진기에 찰칵! 하고 찍혀, 오래되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추억의 내음속에서 이 조그만 공간은 벅차게 각인될지도 모르겠슴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봄은 오고 말았고, 그게 잔치인 줄 모르고 보내버린 겨울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희한에 찬란한 우울만이 상처로 아로새기고 끝나고 말았슴니다.

 어제는 횡성에 오려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시동을 거는데 내내 좋기만 했던 하늘이  마치 얄궂은 애인의 변덕모냥 아침부터 음울하게 드리우더니, 영동고속도로에 드러서자 봄비를 냉냉히 뿌렸슴니다.

 보건소에 도착해 진료실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물끓는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빠져들다가 흠칫 놀라며 털구고, 훈훈한 커피를 타서 마시며 주위를 촉촉히 둘러보는데, 그 때 켜놓은 FM에서 흘러나오는 데미쓰루쏘스의 Still got the blues for you의 멜로디는 창 밖의 흐린 날씨와 어우러져 비수처럼 내 가슴에 한 획을 그어버렸슴니다. 

바로 그 때 였슴니다,
영문모를 미시감이 그 틈새를 비집고 자리한 것은.

 강림에서 유치원 검진을 하러 전재고개를 넘는데, 제법 굵어진 빗살이 앰뷸런스 앞차창에 수없이 꽂히고, 어찌보면 이미 유리창을 뚫고 내 가슴에도 하염없히 박혀 축축히  젖게 했슴니다.

 오후엔 마옥에 이동진료를 갔다오고 컨디션 두 병을 마시고 씩씩하게 횡성군 공보의 송별회에서  맘껏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마시면 마실수록 의식은 명료해져 갔슴니다.

 송별회라, 아! 이제 여러분들과 이별인가요? 하지만 실감은 무감합니다.

아침부터 까닭모를 답답한 것이 빼꼭히 차올라 혼란스럽기까지 하고 공연히 섭섭해하기조차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슴니다, 그동안 고마웠슴니다, 건배!

여기저기서 술잔과 인사가 교환되는데 나는 작아져서, 자꾸 작아져서, 마침내 36cm 쯤 작아져서, 참을 수 없는 고독한 우울을 느꼈던 것입니다.

 오늘 진료실에서 드디어 나는, 나의 혼란스런 답답함의 이유를 예감처럼 눈치챘슴니다.

그것은 내 가슴에 그어진 한 획, 그 벌어진 틈새, 그 사이에 자리한 미시감, 그것이 아쉬운 미련과 함께 자꾸 자라, 나도 모르는 새 이미 자꾸 자라, 마침내 36cm 쯤 자라서 나를 압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정녕 이별은 만남의 마침표가 아니라 다시 만날 약속인 쉼표일진대, 그러한 통과의례로서의 이별을 방해해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들과 성숙한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슴니다.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로서의 이별은 물론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슴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안녕히.

부유상(浮游想)

자꾸 생각이 물위에서 종이배가 널뛰듯 춤추는 것처럼 밑바닥에서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도하고 또 올라왔다가 저멀리 사라지기도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본래 物에는 그 나름의 性情이 있는 법, 그렇다면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의 活은
誤謬였던가,
부글거리는 후회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슬며시 지워본다.      
부디 지금의 나의 관점이 잘못이 아니기를, 그렇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기를...
점심시간이다. 點心, 마음에 點을 찍어라! 그 點의 의미는, 모반의 세월 그 기나긴 미망의 종지를 의미해야 한다.
아까부터 숨죽여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서워, 나는 무서워. 다가오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일들이 두려워,
글쎄 잘 해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계속 핵심의 언저리에서 생각은 겉돌고, 그러기에 더욱 불안해진다. 안돼! 이래서는 안돼! 열려진 가방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상황이 다가온다 해도 그 앞에서 열려진 가방이 되자. 누군가 그안에 무엇을 빼고 또 그 무엇을 넣는다해도 상관없는 난, 열려진 가방이다. 각오의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음을 편하게 두자. 왜냐하면 난 열려진 가발이니까.

지난 여름부터 참 生覺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의 닥쳐온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도 하고, 지나온 짧지않은 세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감개가 무량하더이다.

하루하루 후회없는 삶을 운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냐면 반추된 그 시간들은 거의 아쉬움의 빛을 던지며 가뭇없이 흘러갔으니까요. 산다는 것은 어쩌면 道를 구하는 과정이라는 단상이 설핏 스치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지금껏 인생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난 道는커녕 여직 밀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도 못한 셈이니 마치 퇴행되어 고착된 느낌은 박제되어 앙금집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발자국 또 한발자국씩 道를 구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채우겠습니다.

횡성에서의 3년간 分明 무엇인가 내게 자양이 되었을 그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늠름하게 살아야겠다. 만일 오만한 착각에서 자신감이 비롯된다면 영원히 그 착각 깨어지지말저! 누구나 agoraphobia를 극복할 수 없도다. 오히려 그런 phobia를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겠군. 깨어지는 껍질, 그 고통이야 당연지사고 나비처럼 꿈꾸듯 감내한 후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온 Ego여! 무엇을 보았니, 찰라같은 견오와 각성이 밀물처럼 밀려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거기엔 조그만 포플러 묘목 하나 심어질 때, 주위는 모두 일어서서 박수치며 합창하더라.

도망치듯 머쓱해져 달아오르는 Id여, 만끽하라! 너의 당연한 몫이거늘...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담담하게 인정한다면 지옥같은 마음은 극락되겠지.
소(牛)를 아직 보지도 못했지만, 하여 꼬리조차도 언감생심이지만 소(牛)는 결국 놓아야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기꺼이 접수한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지금, 난 기적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전설같은 이적을 바라는가. 어쩌면 이무기처럼 기다림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 그런 긍정적인 부분만 감가상각하고 이적은 없다고 믿자. 지치도록 두드릴 때 어느새 배게 되겠지. 누구나 꾸려나가는데 나만이 열외는 아니겠지. 침착하게 받아드릴 때, 슬그머니 드나드는 소를 보면서 승천하리라.
천 상병 시인의 말처럼 어차피 이 세상 소풍나온 것 아니겠는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록으로 편곡한 노래가 주병진의 2시의 데이트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 이어 나오는 노래는 이덕진의 <기다릴 줄 아는 지혜>.
요새 노래들은 왜 이러나?  김건모의 3집은 200만장이 판매됬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20명당 하나,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5집당 한 장씩 팔렸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음악성 운운하기엔 비재천학하고 하여간 경이로운 일이다.

고개숙여 인사합니다.
연극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대사를 되뇌어보세요.
느껴지나요?
난 항상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사랑을 당신은 당연하게 생각했죠.        
이제 연극은 끝났습니다.
당신에게 난 안녕을 말합니다.  <마돈나의 take a bow 中에서>

오늘은 한식이다. 한식은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고 하는데(?), 난 한식으로 비빕밥을 먹었다? 이러다가 개기일식날은 일식으로 가쯔동을 먹을까?

한가지씩은 조예가 있어야 된다는데, 난 흐름에 실려 기호(嗜好)가 없으니 몰개성적임.
그냥 남들 하는대로 따라했던 거. 그런 사고방식이 종국에는 인생전체에 점철됨.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라이터는 던힐, 만년필은 듀퐁, 구두는 발리, 넥타이는 에르메스, 손수건은 닥스, 티셔츠는 아이스버그, 가디건은 미쏘니, 벨트는 세린느, 바바리는 버버리... 다원적일 수 없다면 한 우물만 파자. 카메오도 이제는 식상하다. 그렇다면 한 우물은? 패러디가 아닌 당연히 내가 선택한, 내가 가야 할 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냥 몰입하여  무아경에 이른 바보스럽기까지한 시선,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의 절규는 낯설지가 않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요즘은 포스트모던이 무슨 유행처럼 난무하는게 꽤 미래지향적인 그 말은 제법 뽐을 내도 시제의 정의조차 불명확하다. 그래서 또 포스트모던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결국은 쏘피스트 이래로 회의해왔던 실존의 피투성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소박하게 생각본다.

食이 우리네 삶에 차지하는 무게가 실로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에 고소짓는다.
왜냐면 진료를 15분 남긴 지금 배가 고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허기가 실존이라면 역시 본질에 선행하는가.

학교 다닐 때, 이야기 하고파 病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농담처럼 얘기하는 그 친구의 공허한 웃음소리에 짙은 고독이 배어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한 고독한 우울이 정녕 죽음에 이르는 病이 아닐까요?

섬강교를 건너면 갑자기 풍경이 바뀐다. 산들도 강원도가 되고 더불어 나도 강원도가 되는데, 아는가? 내가 가는 횡성은 김유정의 봄봄에 나오는 점순이라는 것을.
그런데 요새 내가 눈치챈 비밀은 횡성이 알렉산드리아였다는 것.
그리고 난 고마움을 모르는 뻔뻔한 철부지였다는 것.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없이 흐르는 의식의 흐름에 자동기술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엉뚱하게도 갑자기 의식의 실체에 대해서 난 의혹이 생겼다.
마치 왜 뛰는지도 모르고 달렸던 타조모냥.
오랬만에 알퐁스 도테의 <월요이야기>를 읽었다. 거기서 마지막 수업을 발견했을 땐
오래전 헤어져 소식끊긴 국민학교 동창생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 횡성은 나의 알사스인가. 정말 이 시간이 영원히 끊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언제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내일로 미루었는데...

가끔 엣날을 생각해봅니다. 뭉뚱거려 한 장면만 상기되고 다른 일들은 곤혹스럽게도 망각의 베일에 덮여 있습니다. 그 장면이라는 것이 사진반 친구가 네거필름으로 찍은 것인데 이학관과 체육관 뒤로 이어진 오솔길에서 아무 생각 없이 횐히 웃고 있는 그녀와 내가 유치원생처럼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는 그 사진을 제법 크게 뽑아 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건네고, 그녀는 그녀의 방 벽위에 걸어 놓았는데,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되리라고 믿었던 그 사진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도 그 장면은 오월같은 라일락향 뿜으며 내 가슴을 짓누르는데...

어찌하다 엇갈린 감정으로 떠나보낸 그녀가 만나자고 했던 어느 겨울 카페에서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흘렸던 그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내겐 이미 애증도 떠나 아무 감정도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조그만 두 손으로 그 흰 예쁜 얼굴을 감싸며 대체 그녀는 왜 흐느끼는 것일까요? 그녀와 같이보낸 다섯 번째 겨울이 지나고 여섯 번째 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났던 그 봄의 라일락 향은 해마다 같건만 그녀는 추억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운 채 떠나버렸습니다.

그 때는 준비없는 이별이어서인지 경황없는 마음은 망연자실 보고만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의미로 다가온 이별은 잠시 공백이거니하는 낙천적인 마음으로 달래도 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모진 게 인생이라 시간이 정지하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고 가끔 그녀를 멍하게 생각하다가 아프게 저며오는 애수를 느끼는 것 외에는 하루하루 난 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행복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의 일렁거림을 바로 보고, 하여 정리하기 위해서.

<행복일지 5>를 쓰고 있을 때 쯤, 좁은 게 세상이라 그녀의 소식을 풍문처럼 들었습니다. 이미 정리되었다고 믿었던 건조한 마음이 먼지를 일며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나는 그녀를 보내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한 모퉁이에서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족쇄에 묶인 수인처럼 그녀도, 나도 자유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를 놓아 보내니,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감정들에서 자유로와졌습니다.
하여, 언제고 언제인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해도 고적한 달빛에서 여울지는 호수처럼 무람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와 엘리나가 그러했듯이, 지난날을 담담히 얘기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조용히 두 손 모아 정말 그녀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은하철도 999에서 메테르 같은 여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샤롯테 같은 여자, 단테의 베아트리체 같은 여자,  이러한 수다한 추상이 나로 하여금 꿈 꾸듯 여자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연암 박지원도 어둠에 쌓인 물이기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님메? 무릇 여자 뿐이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정확히 아지 못하는 가운데 두려움은 비롯되는도다.

친구가 선물로 로트레아몽을 주었다. 악마파와 같은 음산한 분위기는 차치하고라도 어째서 내게 그런 책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친구는 치기에 악마주의에 경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르멘의 하바넬라를 듣고 있자니, 돈 호세에 대한 그녀의 물어뜯는 열정이 느껴져온다. 그렇다면 그녀의 바람은 결국은 호세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 이율배반적인 사랑이여, 보상기제로 따져본다면 반동형성이라 하겠는데, 종잡을 수 없는 얄팍한 마음이여, 결국 에우리디케를 하데스에게 다시 보내게 된 것도 오르페우스의 의심많은 사랑의 아이러니 때문 아닌가.
 
프래그머티즘이 철학이 되는 것은 팝아트가 예술이 되는 것과도 같다.
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과도 같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끼리 모인다.
마지막 공중보건의사.
뫼르쏘의 부조리의 태양
<이카루스의 날개> 또는 <시지프스의 바위>
<악어의 눈물> 또는 <흰꼬끼리>
<기차길과 금붕어의 관계>?

우리는 늘 익사이팅한 일을 기대한다. 삶이 모노토너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것은 옳지 않다. 결국은 본질은 그러하지 않으며, 본질에 다다를 땐 견디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가끔 자기는 죽을 것 같다고, 곧 죽을 것 같다고 근심스레 얘기하는 환자를 본다.
그러나 실제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고, 소위 <미인의 무관심>이 보여진다.
라 벨라 인디퍼런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컨더리 게인을 얻으려는 건데, 우리는 그의 내면에서 절박하게 호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괴테가 말했다, 빛이 밝으면 그 어둠도 짙다고.
나는 또 생각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한다고.
니체는 말해다, 신은 죽었다고.
신은 또 이렇게 말하겠지, 니체는 죽었다고.

지난한 연습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삶도 자동적으로 운위되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획이 필요하다. 그 다음엔 검증도 있어야 겠고. 쉬운 것은 없다.
마음은 비워두자. 그리고 압지가 물을 흡수하듯 앞으로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며 내면화시켜야 한다. 난 영점조정을 하자. 가늠쇠조정, 가늠자 조정, 정조준, 사격! 탕! 난 아무 생각이 없다. 멍하게 모든 것을 꼼꼼히 적고 외우자. 겸손하게. 자만하지 말고 꾸준하게 또 과묵하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성실하여 당당하게, 능력있기보다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자. 또 다시 펄럭이는 道의 깃발 꼿꼿이 서있는, 이 길을 난 돌이킬 수 없는,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명명하겠다. 소언다행, 말을 아끼고 행동을 앞세우자.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란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큭히 쌩스 기빙을 들으면 지금껏 난 참 잘난 척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 같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삶이 감동치며 느껴질 때, 현란한 외화(外華)는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흰 눈이 쌓인 오두막에 혼자 난로지피며 말없이 그 불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나 혼자만의 생각에 침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그 동안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은 어수선한 휩쓸림에 연연하고 천착했던가. 지금 나의 마음밭은 어떠한가? 참으로 쓸쓸하고 쓸쓸하니 쓸쓸하여라. 이제부터라도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자신의 中心을 지켜라. 화려한 거품에 더 이상 미혹되지 말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대지위에 내일의 견실한 씨를 뿌려라. 스스로의 추수(秋收)임에 그 땀의 화장 더욱 아름답고 뿌듯할지니, 쓸데없는 잔신경, 그 쓸데없는 낭비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치한 신경들의 언희에서 초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당한 솔직함이 우선된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나는 나의 삶은 운위하기도 분주한데>... 물론 결론은 니힐일지라도 그 과정에서의 그림에 의미를 두고 보람찬 하루하루를 그려가겠노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김소운이 썼던가, 가난한 날들의 행복 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물론 작가의 말대로 가난은 자랑은 아니지만 그 속에 진주같은 소중한 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러하듯이 이제부터 마음이 가난한 나는 나의 각오를 존중하고 견지해야겠다. 내 가난한 마음을 위해서 축배를 들자.

예전에 고르기아스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이 말의 향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에 흔들흔들 떠 다니는 사념의 편린들을 바라보자니, 어쩌면 그가 은근한 달빛이 질퍽거리는 어느날 밤하늘에 설핏 유성처럼 스러지는 소(牛)의 그림자를 밟았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 안에 소용돌이 치는 사념이 과연 있기는, 그 실체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암튼, 안다해도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이런저런 단상들을 횡설수설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오늘, 횡성에서의 마지막 진료인데도 덤덤하기만 합니다. 그렇죠, 어떤 의미를 쓸데없이 부하한다는 것도 감정의 허영이겠죠. 과장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나는, 이제 네 시간 남짓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의 마지막 횡성에서의 진료를 장식하겠습니다. 그리고나서 보건소 밖에 눈이 아프도록 다가서는 태기산을 바라보면서 진하게 담배 한 대 피울 것입니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에 회색의 심정을 기화시켜서.    




Posted by 베스트닥터

2012/02/01 12:10 2012/02/0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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